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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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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 무릎 꿇는 자의 승리 (엡 6:18-2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2-09 | 조회: 931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합니다. "기도가 제일 힘들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1분만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목사님 기도를 꼭 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가끔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 기도 때문에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어찌도 그렇게 부러운지, 또 기도를 응답 받았다는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람을 보면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신령한 사람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저 역시 어쩌다가 조찬 기도회 때, 대표기도를 해야하는 기회가 주어질 때면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리고 당일까지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로 힘이 들었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에 이 질문을 한번 담고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대답입니다. 기도의 거장인 바운즈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대신할 만한 것도 없고 기도에 버금갈 만 한 것도 없다.” 옳은 말입니다. 정말 기도를 빼버리면 신앙생활은 심장이 멎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할 때에는 뜨겁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바로 해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면모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영적 생활이 무엇입니까? 영적 생활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던 사람이 믿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이야기하면서, 그것만으로 사단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기도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1.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여기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인데 어떻게 도우시는지 아십니까? 8: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성령이 도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돕는다는 뜻은 어린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쓰러진다고해서 부모는 그 아기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으켜 주며 넌 잘 걸을 수 있어!” 격려하며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부모의 도움을 말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성령님도 그렇게 도와주십니다. 또 하나 이 단어가 쓰여진 경우의 예는 한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더 이상 버틸수가 없게 되었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곁에 오더니 그 짐을 같이 들어주고 가는 경우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이 무거운 짐을 지고 쓰러지며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내 곁에 다가오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해 보셨습니까? 요한복음에는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부름을 받아 내곁에 와서서 계신 분이란 뜻입니다. 내 삶의 위기와 난관 속에서 나를 돕기 위해서 내 곁에 다가와 내 집을 함께 들어주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아예 이 짐을 없애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성령님은 내가 지고 있는 짐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같이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짐을 내가 지고가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짐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짐을 지고 가면서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내 모습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나의 진정한 필요을 도와주심으로 마침내 승리의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지 못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부족한 나를! 위해 끝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기도하십니다.

 

여러분,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가 갈멜산 상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울 때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또한 36개월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던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게 했던 장본인이 아닙니까? 신약의 약5:17에서 그의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성경은 엘리야에 대해 많은 것을 칭찬할 수 있었고 만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평가했던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한 광야에 초라한 나무 밑에서 죽기를 요청합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가 쓰러졌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그가 했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는 이제 앞으로 나갈수 없습니다. 그냥 내 생명을 취해 가시옵소서.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낫겠습니다. 하나님 죽여주옵소서어제의 그가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을 한껏 체험했던 모습은 간데없는 영적 슬럼프에 빠진 연약한 한 초라한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 같은 영적 침체에 빠진적은 없습니까?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이 밀려들고 지금 이 상황을 내 힘으로는 내 능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하는 낙심의 자리에 빠지지 않았나요?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이며, 비밀의 세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역사의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들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의 선진들은 한결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습니다.

 

2.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깨어 기도하는 것을 영적인 불침번을 서는 것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깨어라는 말은 병사가 군대에서 한밤중에라도 자지 않고 깨어서 적의 공격을 감시하기 위해 긴장해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누가 나를 잡아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졸면서 보초를 서겠습니까? 눈을 부릅뜨고 깨어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시자처럼 달려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사탄에게 속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힘써야 합니다. 아마 우리 모두에게 가장 자신 없는 것이 있다면 기도일 겁니다.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기도의 자리에 가셨습니다. 38절을 보면 이렇게 세 사람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중에 잠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고 있었습니다.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여기 기도에 깨어있다는 것은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고자 할 때 기도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들 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기도할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늘 기도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주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준비하셨습니다. 3년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는 그 고된 사역 속에서도 주님은 밤만 되면 홀로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디 그뿐이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도 겟세마네 산에 오르셔서 애써 힘쓰시고, 주의 뜻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통곡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기도의 삶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왜입니까? 여러분 주님은 기도 없이도 충분히 모든 것� �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기도를 하셔야만 하셨을 까요? 그것은 기도해야만 바르게 깨어 있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첫 시작 할 때에 주님은 기도를 통해 마귀의 간교한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영광을 위한 삶이 이 세상에서 진정한 성도의 삶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고단한 사역 속에서도 산에서 기도하심으로 깨어 기도하는 자에게는 매일의 힘과 능력, 삶의 방향과 지혜가 주어짐을 보여주셨습니다. 보세요. 주님은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주님이 처절한 기도의 불침번을 서심으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 승리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 기도하는 자에게는 인생의 수많은 결정 앞에 무엇이 바른 결정인지를 아는 하나님의 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간섭이 시작 됩니다. 깨어 영적인 불침번을 서는 자에게는 사단 마귀가 아무리 방해하고 공격해 와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기도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시작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18-2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서로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 중보 기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성도를 위하여 .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중보 기도는 사랑이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개혁 주의자들은 기도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기도의 자리를 나가기가 선뜻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기도의 자리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피하면 평생을 살아도 영적인 풍요를 한번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한 번만이라도 승리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고든 맥도날드가 쓴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유형을 가르쳐 그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driven life)이라고 했고, 또 다른 유형을 그는 ?소명에 이끌리는 삶?(called life)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하루 하루를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그리고 감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인생을 상처뿐인 전쟁터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에 이끌리는 삶은 다른 차원의 삶입니다. 그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는 여론을 경청하지만 여론에 의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확인한 후 자기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이런 삶이 갈망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기도하시면 그렇게 사실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갈망을 현실화한 당당한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낭비일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그렇게 비유하더라고요. "기도와 헬리콥터가 같다"라고. 헬리콥터 동체는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러나 헬리콥터 위에 긴 이 날개, 로트를 달아 가지고 회전하면서 이 쇳덩어리는 하늘을 날아 올라가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피곤하고 힘들고 죄의 짐을 짊어지고 우리의 삶이 한없이 무겁고 곤궁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인생을 들어올리게 하십니다. 기도는 우리를 들어 올리는 시간이에요. 기도를 통하여 신령한 삶으로,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새벽기도 나와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들어 올려지고, 건강이 들어 올려지고, 가정불화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는 가정이 됨을 느끼게 됩니다. 경험합니다. 들어 올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들어 올려 주시고 모든 걱정 근심 죄악에서 우리를 들어올리는 시간이 새벽시간이요 기도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시기보다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깊은 옥중에 있습니다. 내일 일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이 눈물과 겸손과 기도로 섬겨온 이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영적 전쟁터에서 늘 승리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기도의 동력을 통해 세상을 향해 복음이 마음껏 증거 되는 교회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릎 꿇는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드러날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악기들은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나무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그 나무로 악기를 만든다고 합니다. 해발 3천 미터 정도 올라가면 거기서 부터는 수목한계선 지대가 있는데 여기서는 나무가 자생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간간히 나무가 자라는데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곱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이나 아주 귀한 목재로 만들어지는 악기들은 바로 이 무릎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아픔을 견딘 나무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고난을 견딘 나무를 통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소리를 담은 악기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성도 가운데 아름다운 영혼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보면 대체적으로 무릎 꿇은 나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이 연말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가 영적 무장을 잘하였는지 점검을 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셨나요? 의의 호심경을 붙이셨습니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있나요?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는 믿음의 방패가 있나요?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내가 누구인가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에서 당당히 살고 있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무기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궤계를 능히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기름이 없으면 가지 못합니다. 그 무기들에는 연료가 필요합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하는 성도, 깨어 사랑의 줄로 묶고 하나되는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불침번으로 기도의 불길이 우리의 삶 속에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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