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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6 빈 방 있습니까? (누가복음 2:1~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2-17 | 조회: 1050

빈방 있습니까? 2;1-7. 2018. 12/16.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주일입니다. 이번 성탄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서로 기뻐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탄생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에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뿐이고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우리가 무슨 말로 설명을 하고, 우리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연구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6, 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적 하러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 방 있습니까? 빈 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 저곳 찾아다니면서 빈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배가 불렀고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방이 있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하나 그들을 위해 방 하나를 마련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찬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이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헌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보세요. 세상이 버린 곳,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마구간에 아기로 오신 예수, 바로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빈방 하나를 구하기 위해 외치며 다니는 그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우리 인간 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 구유에까지 당신의 자리를 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번 성탄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구유를 준비해야하지 않겠습니까?

 

1.성탄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 마음의 정리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을 기도하시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앞에 나아와 고침을 받습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질병에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끝만 닿으면 고침을 받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은 기적을 바랬고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자기를 향해 오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낮아진 자 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에겐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마음으로 가득한 것을 비우지 않으면 하나님 풍성함을 맛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도 대단한 희생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신 자리가 마구간입니다. 그곳은 인간이 내려갈 수 있 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거기다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 생활을 하십니다. 사람들을 위해 오셨는데 그 사람들에게 쫓겨 피신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53:3절에?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했습니다.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하시는데, 사람들은 그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문둥이 취급하고 멸시했어요.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보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 마땅히 거처할 집한 칸 없어서 밤에는 감람산에서 주무실 때가 많고, 또는 가난한 3남매가 사는 나사로의 집에 머무를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도 마땅히 묻히실 무덤하나 없어서 아리마대 요셉 무덤을 빌려서 묻히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예수님을 볼 때 30세 되신 분을 50으로 보기가 예사입니다. 이처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쏟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그 고초, 그 희생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 섬기러 오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는 높은 보좌 위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가문, 부유한 가정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꺼려하는 짐승의 냄새가 배여 있는 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그 예수와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내 마음을 비어놓으십시오. 살면서 무엇이 더 중요하십니까? 내 생활의 한 부분은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드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마음을 주님을 위해서 비어 놓을 때, 그때만이 사랑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 땅의 소외된 곳과 그늘진 곳,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과 마음을 함께 하고 어울릴 수가 있습니다.

 

2. 그 당시 예수님에게 머무실 곳이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방이 다 차있다 할지라도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기만 했다면 어찌 구유에서 분만하도록 했겠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말세에 나타날 일곱 교회 모습을 보여주면서 항상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십니다. 세상에 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을 모르실리 없는 주님께서 왜 하필이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깊이 깨닫고 새기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요셉과 마리아에게 마굿간을 빌려준 그 주인은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태어나셨는데도 그분께 경배하지 못하고 왜 만나지 못했습니까?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마굿간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천군천사의 찬양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립니다. 베들레헴 주변에서 양치기 하던 목자들도 찾아와서 경배를 드리고 갑니다. 그런데 왜 유독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굿간 주인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은 그 마굿간에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와 산모를 데리고 바로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이나 자기 집에 구세주가 누워 계시는데도, 그리고 여러 사람이 메시야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들락거렸는데도 마굿간 주인은 메시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분께 경배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빠서 그랬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 마굿간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마굿간 주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메시야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에 있었음에도 너무 바빠서 정말로 중요하고 귀한 손님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6개월 먼저 왔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어머니,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아주 평범한,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살다가 이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구를 이끌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 옆으로 밀쳐 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10대 후반이거나 아니면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나이의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평생 목공소를 경영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의 여러 마을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끼이지 못하는 아주 후진 곳입니다. 따라서 별 볼일 없는 데서 태어나 그저 한 생 살다가 가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목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당시에 목자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천민 중에 하나였습니다. 남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 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하는 천민들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탄생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좋아하던 시므온이라고 하던 선지자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다 초라한 사람들이요, 평생 외롭게 산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사람은 결혼하고 7년 만에 과부 된 후고 84년 동안 아무 혈육 없이 그저 성전에서 날마다 심부름이나 해 주고 기도나 하고 먹을 것 없으면 금식이나 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 이런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 말입니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천대받는 사람이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요, 세상에 무슨 소망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이 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모두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통해서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서, 두 노인은 성령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에 징조도 없고 계시도 없이 태어나셨겠습니까?

 

여기 등장한 이 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계시를 받고 그것을 순종함으로 이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된 신앙생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영적인 안목이 열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을 부탁합니다.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는 영적 무지한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주님을 위해 바르게 살 수 없고 바르게 헌신할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3.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무정함 때문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일이 바쁘고 영적으로 무지하다 해도 지금 만삭이 되어 아이를 해산하려는 여인을 문밖으로 내쳐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들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이 사회야 말로 얼마나 무정한 사회입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엔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어렵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저변에 깔려 있어요.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안전하면 되고, 남이야 춥든 말든 나만 따뜻하고 행복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내 위주로만 삽니다. 이런 마음에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요즘 극장가에서 상영하는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를 보면, 결국 나라가 수치스러운 IMF 관리에 들어가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신용을 잃은 게 가장 큰 윈인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용경색'이 일어난 것입니다. 색이라는 말은 혈관이 혈전 따위로 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색이 무서운 것은 결정적인 고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정상처럼 보이다가 일단 조짐이 시작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막히고 닫힌 사회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곳곳에 경색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의 곳곳에 막혀 있는 혈전을 녹이고 뚫는 것은 베풂에 있습니다. 주는 삶, 베푸는 삶은 우리 사회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아니하고 건강한 피의 순환을 촉진하는 최고의 명약이 아닙니까? 탐욕의 기름기로 범벅이 된 탁하고 끈적한 피는 사회의 혈관을 구석구석까지 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쏟는 그 생명의 나눔은 이 땅에 수많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을 살리는 구원의 열매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베풂에는 기적의 요소가 있습니다. 리가 하나를 베풀면 예수님은 거기에 손을 얹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열배 백배의 기하급수적 은혜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던 오병이어의 사건은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 역시 허기졌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예수 위해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한 그릇이라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노숙자들을 섬기는 일에 10여년을 등대교회와 함께 했습니다. 이번에도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단지 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탄절이 되면 엉뚱한 일로 바쁘고 많은 행사나 프로그램으로 지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절 의미는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Guide Post지에 실린 실화가 있습니다. 작은 동네에 Wally라는 9살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본래는 4학년이어야 했지만, 지적능력이 떨어져서 2학년에서 공부를 합니다.2학년 꼬마들은 항상 그를 빼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뒷전에서 꼬마들을 쫓아다녔습니다. 그해도 성탄절이 가까워지자 교회에서 성극을 하는데 Wally는 피리를 부는 목동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선생님은 그에게 더 중요한 역인, 여관집 주인역을 맡겼습니다. 베들레헴의 여관집을 전전하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퉁명스럽게 ?빈방 없소?라고 말하면, 연극 효과가 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날 드디어 무대가 오르고 마리아와 요셉이 죄진 몸으로 여관 문에 다가가서 두드렸습니다. 여관집 주인인 Wally가 퉁명하게 묻습니다. 뭘 원하세요? 요셉은 빈방이 없습니까? 하고 초조한 빛으로 물어봅니다. 여관주인 Wally가 대본 그대로 말합니다. ?없소, 딴 데 가보시오.?그러자 요셉이 사정합니다. ?주인, 우리는 멀리서 왔고, 아내는 막 출산하려 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때 Wally는 나귀 위에 엎드려있는 피곤에 지친 듯한 마리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더 이상 대사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던 선생님이 긴장을 하고 대본을 잊은 줄 알고 소리 내어 읽어주었습니다. ?Wally야 이렇게 말해! 안돼요. 가버려요, 하고 말이야!?

 

그러나 Wally는 꼼짝도 않고 줄 곧 마리아의 얼굴만 쳐다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어색해진?) 모습을 하면서, 뒤를 돌아서 무대 뒤쪽으로 사라지려고 했습니다. 그때 돌아서서 가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Wally는 대본에도 없는 말로 소리칩니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우리 집에 내 방이 있어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극을 보던 많은 관객들은 큰 감동 속에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이제 내일 우리는 뜻 깊은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주님을 위한 방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비어둔 방이 있으십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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