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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기쁘다 구주 오셨네 (누가복음 2:8-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2-23 | 조회: 1051

기쁘다 구주 오셨네. 


좋은 성탄주일 아침입니다. 성탄주일에 우리 동성교회에 예배하러 오신 것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구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거룩하신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우리 모두 옆 사람과 성탄절 인사를 하십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을 축하합니다.’

 

요즘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 의사표시를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 전화를 발명한 후로 사람들은 음성 메시지만 주고받다가 핸드폰이 나오면서 문자 메시지를 함께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음성과 문자 그리고 영상 메시지를 모두 함께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게 된 지가 벌써 26년이나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계 최초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있는데 그가 영국의 컴퓨터 엔지니어 닐 팹워스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1992년 12월 3일에 문자 메시지를 만들어 자신의 동료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최초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merry christmas!’입니다.


이 핸드폰에 문자를 넣어 처음 전달된 메시지가 성탄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사용하는 메시지 전달 방법을 사용하시는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대로 성탄 소식을 전하고 싶어 하시는구나”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이 메시야의 탄생, 이 기쁜 소식에 누가 초대를 받았습니까? 당시 그 나라를 통치하던 정치적 실세인 헤롯입니까? 아니면 영적 지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제사를 통해 영향력을 끼쳤던 대제사장입니까? 아니면 평생 성경에만 파묻혀 살았던 서기관들입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상식에 커다랗게 빗나간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외로 당신의 그 영광을, 당신의 그 탄생의 거룩한 신비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밤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주는 것을 업으로 삼던 목자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고,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할 목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천사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던 이 목자들에게 한 가지 소식을 들려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다 기뻐할 너무나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지만, 아들을 보내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들이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인데,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것인데, 죄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죽을 것인데, 그 아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 주님은 이 높고 높은 곳에서 이 낮고 천한 곳에 골짜기를 넘어서 올 수 없는 환경을 넘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오셨듯이, 넘어져 있고, 지쳐있고,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나를 찾아오심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알지 않습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허무와 저주 가운데 죽어갈 영원히 멸망할 우리 자신들을 주님은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죽여서까지라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따라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성탄이 왜 우리에게 그렇게 기쁜 소식이 되는지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9절을 보면 “주의 영광이 두루 비추매”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두루 비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자들이 성탄 소식이 전해지는 그곳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목자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광경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에 저들은 그저 두려워했다고 설명할 뿐입니다.

 

그러면 주의 영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대부분 주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출 24:16-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강림하신 맹렬한 불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성탄 소식을 들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성탄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예수 탄생과 함께 주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 가득한 주의 영광이 예수가 이 땅에 오심과 동시에 이 세상에도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요 1: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주를 영접한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그 신비한 광경 앞에 다만 두려움에 휘쌓였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 ‘큰 기쁨의 소식’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는 바로 예수의 탄생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일까요?

 

첫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도 TV 뉴스나 혹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밀엽꾼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야생동물을 잡기 위하여 산 속에 불법으로 수십 개의 덧을 놓아서 밀엽을 하는 내용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발이 짤려져 나가면서 몸부림치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언젠가 새끼를 벤 어미 산돼지가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탄이 설치한 죄와 사망의 덧에 걸려서 신음하며,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그렇게 점점 죽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죽음의 덧에 걸려서, 죄악의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 죽음의 덧에 걸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죽음의 덧인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마침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던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죄악의 덧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려고 바로 베들레헴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예수입니다.

 

마1:21절을 보면 그 구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받아야할 그 죄의 값을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은혜입니다.

 

둘째,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기쁨의 소식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니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축복이 찾아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축복은 “임마누엘”입니다. 임(im)은 함께, 마누(manu)는 우리와, 엘(El)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 ‘함께’라는 말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함께 살아갈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고 이 땅을 떠나갈 때까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셨습니다. 교제할 수 없을 것 같이 높아 보이던 하나님이 맘껏 친구처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히13:5의 말씀에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과연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never’입니다. '결코'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겠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인간 중에 가장 보호를 철저히 받는 사람이 있다면 대통령일 겁니다. 대통령이 어디를 행차하면 몇주전부터 난리죠. 답사를 하고, 맨홀 뚜껑까지 열어보면서 철저히 검색을 합니다. 그리고 수십 명이 에워싸고, 일단 유사시에는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총탄을 대신 맞으면서까지 경호합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국가 원수들이 암살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이 말씀이 마태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께서 임마누엘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맨 앞에 기록했고, 비록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그래서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지난날에도 우리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이를 때까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쓴 "그 이름"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소녀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닙니다. 사실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이 짙게 깔린 들판에서 예수 탄생을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죄의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 하나님과 다시 에덴의 그 평화를 회복하는 예수 탄생은 우리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의 새 아침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고 임마누엘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 성탄에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 죄 사함의 기쁨! 그 죄 사함의 기쁨이 열리며 얻어지는 임마누엘의 복! 이 두 가지를 누리신다면 이 땅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이 여러분 위에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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