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마22:34-30. 2019. 1/6 신년 예배
여기 모인 모두가 새해라는 선물을 받았지만, 아마 여기 모인 우리는 다 다양한 생각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작년에 경제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선전한 사람은 어떤 기대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나이는 들죠? 변한 것은 없고, 오히려 내일이 썩 희망적이지 못할 때, 우리 안에 막연한 두려움과 염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지금보다 삶이 조금 더 여유로워졌으면 하는 바람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신앙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이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바람이나 소망 말고 신앙인으로서 갖는 바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인으로서 여러분은 새해 어떤 소망을 갖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주님은 이 새해에 어떤 관심을 갖고 이 세상을 바라보실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크고 높으신 주님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있는 관심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분 이 전심으로 사랑하시고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거는 대상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교회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설혹 교회가 조금 잘못된다 해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신 다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제자가 된 우리들은 얼마나 더 교회를 사랑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자연 이런 소원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 이 교회를 그처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면 나도 한 생을 살 동안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지. 좋은 교회에 다니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야지”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이요, 또 여러분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올 해 우리교회의 표어는 ‘세상을 향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이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요, 나눔은 우리가 받은 그 십자가의 넘치는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어느 바리새인 율법사와의 대화 내용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 그분의 하신 행동, 그리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너무도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심각한 도전이요 걸림돌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자기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율법을 어길 뿐 아니라 부정하는 것처럼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까지 했습니다. 그런 계략의 일환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겁니다. 36절에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당시 이 질문은 함정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 등 유대인들은 10계명의 율법을 세분화시켜 놓았는데 무려 613개 조항이나 됩니다. 꼭 해야 할 것 248개, 하지 말아야 할 것 365개 등으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모호해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 하고 있었습니다. 지킬 생각은 안하고 논쟁만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게 바로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불신앙이요 타락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한 겁니다. 그래서 만일 답변을 못하면 실력 없는 자라고 몰아세우고, 혹 어떤 답변을 하시면 백성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분열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서 신앙의 핵심이 사랑임을 분명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37-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하신 가장 핵심적인 명령을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는 사랑의 구체적인 삶은 나눔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서전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한두 권의 자서전은 다 읽어보셨을 겁니다.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진솔하게 써 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에 프랜시스 탐슨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생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쳐 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인생이 상당히 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일찍이 목사로 만들려고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고 맙니다. 그러자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가 다시 그를 설득해서 의대를 지원하게 했습니다.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도 중단해 버립니다. 결국 그는 런던 시내 한가운데 노숙자가 되어 버리는데, 거기서 마약을 하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생활을 하며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간 순간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의 재능을 윌프레드 메이넬이라는 한 출판사 사장이 발견하고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마약을 끊게 만들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품어주며, 인내하며 그를 결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올려놓습니다. 그가 훗날 유명한 시집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천국의 추적', 재미있는 제목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합니다. 그가 왜 그 시집에서 하나님을 사냥꾼으로 묘사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새사람이 되어 어느 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자기를 변화시킨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자기를 만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음을 깨닫고 그 은혜를 자신의 책에 썼으며, 그 제목을 '천국의 추적', 이 얼마나 멋있는 제목입니까?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의 추적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혼의 추적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span>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나서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부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시 부르셨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 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을 더 알기 위해, 37절에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처녀가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늘 마음은 옛날 애인에게 있다면 그것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이 함께 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숨을 다해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아펜젤러 선교사도, 주기철 목사님도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순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뜻을 다해서’라고 했습니다. 정성껏 하라는 것입니다. 시간, 돈, 젊음, 은사 이런 것들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Ⅱ.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께서는 오른 쪽에 있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 때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공궤하였습니까?” 주님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볼 수 있는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베풀고 도와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그가 살던 고향 도시지역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닥터 앨 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빚 갚기 위해 서 입니다.??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통 빚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30살에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흑인들을 위해 의사로 복음전도자로 90평생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부탁인 복음을 위해 산 한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불쌍한 영혼들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제대로 미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게 안 되면 신앙생활은 주님이 주신 기쁨도 감격도 사라진채 정말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맡겨진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주님 닮기를 열망하던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한 채 땅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십니까? 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겠다는 헌신과 희생으로 불타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다 타버린 잿더미처럼 싸늘하게 식어진 채 무력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사는 열정을 상실하고, 열정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자신의 현실 자체를 직면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인생을 다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먼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삼손을 아시나요? 그 능력의 삼손이 여인의 무릎 앞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당한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 눈이 뽑힌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놋줄로 묶고 연자 멧돌을 돌리게 하는 무기력한 인생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119: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이는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 닫히면 성도는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보세요. 자기 옆에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교회다움을 찾으려면, 교회의 숨겨진 비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안에는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2개의 대표적인 호수가 있습니다. 요단강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에서 흘러온 물이 모이는 갈릴리 호수와 요단강을 통해 갈릴리 호수 물이 흘러들어가는 사해입니다. ‘헤르몬산’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이는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전 국토에 물을 흘려보내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고, 물고기가 풍성한 생명의 바다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물이 모이는 사해는 물을 밖으로 내 보낼 수기 없기 때문에 물고기 한 마리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누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풍성함이 있지만, 모으기만 하는 곳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사랑이 많은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못해도 사랑은 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도 사라지고 소망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줄 압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리면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해 낼 수 있는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지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랑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바로 사랑입니다.
금년 2018년 우리 교회 표어를 “세상을 향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로 정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잘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날개로 날갯짓을 하고 두 바퀴를 제대로 작동시켜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 사랑하는 일은 지금까지 한 것처럼 열심히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하는 일은 지금까지 보다 더욱 열심히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그 은혜 앞에 선 우리들은 섬김과 나눔이라는 두 날개를 펴서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