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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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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7 서로 돌아보는 공동체 (히10:23-2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9-01-27 | 조회: 1203

서로 돌아보는 공동체 10:23-25.

 

오늘 본문 23절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으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 말은 신앙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비극은 초심을 잃어버림에서 시작합니다. 저 자신도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방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목양일념이란 빛바랜 액자입니다30년이 넘은 액자입니다. 오직 너에게 맡겨진 양에게만 인생을 걸라는 것입니다. 목사도 성도도 초심을 잃어버린 순간 변합니다. 본질에서 이탈합니다. 변질된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권면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았고, 외부적으로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악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악형을 받았다는 것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희롱과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결박당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돌에 맞아 죽기도 했고, 톱에 잘려 죽기도 하고, 칼날에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염소나 양의 가죽을 입고 광야로 쫓겨나서 굶어죽거나 뜨거운 태양에 목이 말라 죽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신앙의 박해는 여러 가지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신앙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박해 받는 힘든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이 신앙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갈등을 합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박해 속에서 신앙에 갈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박해로 인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으라

이 말은 지금 고난이 있고, 지금 어려움이 있을찌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고 예수를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요즘 중국은 엄청난 기독교 박해- 십계명 가운데 성경에서 빼라. 북한 세계 1위 기독교 핍박 나라 성경 발각 되면 총살.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핍박이 없다 할찌라도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거나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현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말세적 현상들이 가득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패륜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음란문화가 창궐하고 성범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도 모자라 동성결혼까지 합법화하자는 흐름이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물론 이런 말세적 현상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보다 더 심각하게 지적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딤후 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말세적 현상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들이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현저한 것이 세상을 향한 관심 때문에 신앙의 이탈 현상이 점점 심각해 져 간다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여러분, 당시 히브리서가 쓰여 질 당시 교회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성도들은 하나 둘씩 감옥에 갇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거세게 밀려오는 고난의 바람에 밀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 나고 심지어 믿음을 버리는 자까지 생겨납니다. 그럴 때 저자는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소망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재림 신앙을 갖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더욱 모여 핍박 앞에서도 견디어 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24절에 서로 돌아보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서로 돌아본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공동체 공동체란 좋은 일만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험하고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순간은 우리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죄의 위협아래 있을 때이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 춥고 서러운 곳일 때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께 자멸하는 것이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 내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악의 위협가운데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을 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형제의 아픔을 우리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한 교회를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15차례 이상이나 교회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몸은 몸인데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는 우리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몸의 각 지체는 각자 하나님과 관계를 잘 맺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친구나 주변 환경 때문에 교회 오기도 하지만 그 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체들끼리 성장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모습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서로라는 말이 무려 50번 이상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해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권고하고, 서로 문안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받아들이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복종하고, 서로 헌신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 등, 진정한 성장은 관계 안에서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226절에서도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말씀하면서, 병든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병에서 놓임 받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유기체가 되어 다른 지체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교회됨의 본질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몸 일부가 상처를 입었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몸에 큰 이상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병이 바로 그런 병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이 잘라져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발에 가시가 찔려도 아픈 줄 모릅니다. 코가 문드러져도 전혀 통증이 없습니다. 그것이 나병입니다. 만일 성도가 서로의 고통을 감싸주지 못하고, 서로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나병에 걸린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장 난 신앙입니다. 교회 안에 아픔이 있을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우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2. 서로를 돌아본다는 것은 격려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장 많이 넘어지는 시기가 20-30대입니다. 마음은 아직 청소년인데 몸은 벌써 어른이 되고, 온갖 유혹과 시련은 몰려옵니다. 그러다가 꿈을 안고 결혼했으나 생존경쟁의 치열한 전쟁에 나도 모르게 내몰립니다. 40대는 어떻습니까? 어떤 분이 한국에서 40대로 사는 것은 사망진단서를 받고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성문화 연구소 이의수 소장이 낸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한참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40대 남녀는 아플 수도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50대는 어떨까요? 서울대학교 송호근 교수가 쓴 책 제목이 이 시대의 분위기를 대신합니다.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50대가 얼마나 힘들면 이 소리 내 울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요?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경쟁사회 이기에 성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생존경쟁, 수출경쟁, 등 이미 우리는 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말로 심각한 것은 목표만을 추구하다 보니 인간성은 짓밟히고 인간이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 되어버리고 마는 인간성 상실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판이니 자신의 학력을 속여서라도 성공을 위해 모험하는 사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sns나 방송매체를 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바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 보면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리 모두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누구라서 격려가 필요 없겠습니까?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성도와 성도간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격려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어 달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겁니다.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격려의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3. 그리고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여기 습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전을 보면 습관이란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반복적인 행동이며, 이것은 후천적인 행동이다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굳어진 습관은 후천적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습관은 2의 천성이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평생을 좌우)’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모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어울리면 느끼는 은혜의 강도가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사랑의 온정이 있고, 기도의 열정이 있습니다. 뜨거운 눈물의 찬송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온정과 기도의 열정과 뜨거운 눈물의 찬송, 그리고 감격적인 예배가 우리 영혼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노폐물들을 제거시켜 줍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예배드리며 말씀 듣는 것과 집에서 말씀을 듣는 것은 다릅니다. 요즘 미디어가 발달해서 집 안에서도 전국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설교가들의 열정적인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이 안목사의 설교는 너무 초라한 밥상같지요. 이 안 목사가 어찌 그런 분들의 설교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이 부족한 안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여기 모인 것은, 단순히 안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설교만으로 따진다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분들의 설교가 훨씬 좋지만, 은혜는 여기에서 더 많이 받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기가 바로 은혜의 보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말씀을 들으니까, 설교는 별로 신통치 않은데도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 조각목. 디엘 무디 500군데 200만명이 회심 당신은 그 정확한 논리로 몇 사람이나 구원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자주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자주 모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인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기쁨이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싫어지고 자꾸만 교회에서 멀어지는 사람치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죄악의 찌꺼기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의 보좌 앞에 설 때입니다. 교회는 의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보세요. 점점 모임이 시들해집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적당히 경계선을 그리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내 몰아 죽게까지 한 정말 무서운 세상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선 내 모습은 머리 잘린 삼손처럼 외형은 멀쩡한 것 같은데 우리 속은 텅 비어버린 능력도, 열정도 살져 버린 모습이 아닙니까?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고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혹시 진리의 말씀을 붙잡는 일에 기도로 진검 승부하던 그 일에서 점점 멀어지지는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내어 줌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의 이런 저런 사람을 세우시고 주의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서로 돌아보는 함께하는 공동체의 삶!! 그리고 격려와 더불어 좋은 습관을 훈련받음으로 나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마지막 때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번영이 아니라 고난을 사모하며, 고지가 아니라 미답지를 찾는 복음의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영적 어두움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청년들은 새벽이슬처럼 주의 날개를 엎혀 복음의 향기를 온 땅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젊은 성도들은 성령체험 하여 교회에서 서로 돌아보는 건강한 신앙인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이 강단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피 묻은 복음을 목이 터져라 선포하는 곳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재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말만 나오면 눈물이 울컥하고, 격하게 끌어 오르는 기도와 찬송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이번 50주년은 동성교회가 서로 돌아보는 그 십자가의 깃발 앞에 다 모이는 은혜의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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