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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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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3 뜻 깊게 보내는 명절 (요 5: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9-02-03 | 조회: 967
뜻 깊게 보내는 명절
 

이제 이틀 후면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설날입니다. 우리나라는 설날이 있어서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이원수 선생님이 작사하시고 홍난파 선생님이 작곡하신 고향의 봄이란 가곡을 많이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불러도 불러도 싫증이 없는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누구나 자기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2.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 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젠 지구촌시대에 살면서 옛날처럼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적어졌어도 그래도 고향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고향을 찾아 가는 민족대이동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고생길이 된 다해도 사람들은 즐거운 얼굴로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돌아오면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은 고향 가는 길이 고생길이라 해도 그것은 행복한 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1절에도 보면 ‘명절’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 민족은 ‘설날’과 ‘추석’을 명절로 지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는데 여기에 소개 되는 유대의 명절은 아마 오순절이 아니었겠냐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명절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유대의 예루살렘 거리도 온통 축제분위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양의 문에 통과하여 들어오시더니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지 않으시고 베데스다 연못으로 향하십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다면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당시 모든 사람들이 외면한 베데스다 연못가로 가십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예수님 뒤를 따라갈 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번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Ⅰ. 명절을 선교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데스다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한 맹인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와 같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득실거렸습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모아놓은 임시 막사와 같은 처참함 모습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의사가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여 낙심한 채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의 “병자들”이란 말은 ‘약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몸이 병들어 아프기도 하지만, 가진 것 없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건강하면 정신적으로 병들었고, 정신이 건강하면 육체가 병들었기도 합니다. 멀리서 보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모두가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성 환자, 중독 환자들도 많습니다. 중독도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없는 불구의 몸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가의 사람들은 몸도 불편한데, 가끔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언제 물이 동할지 알 수도 없고, 누군가 먼저 뛰어들어가면 그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와 은혜의 집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실제적으로 자비와 은혜 밖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거기에 가면 희망이 있을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정작 해결 받지 못하고 고통의 문제가 그대로 있으면서 막연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향 가는 길도 보면 어떤 희망을 가지고 나서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습니다. 요즘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 핵가족 시대에 모처럼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게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래전에 핵가족화 된 구성원들이 갑작스레 전통적인 가족군에 들어가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평소에 떨어져 있던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갈등이 증폭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관계가 좋지 않은 가족이라면 오히려 명절을 계기로 갈등이 커질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친척들과 비교되는 상황에 부담감과 중압감을 느끼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작년 통계인데 이 때가 ‘황혼 이혼’이 가장 늘어난답니다. 해마다 명절연휴를 보내고 나면 해묵었던 감정이 불거져 ‘명절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가족과의 화목한 시간을 보내며 우애를 다져야 할 명절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조장하는 셈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Ⅱ. 주님의 발걸음은 한 영혼을 주목하십니다.

오늘 이 베데스다 연못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주셨습니다. 5-6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누구를 보셨다구요.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 1년 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절망이 아닙니까? 38년이라는 숫자에서 주는 느낌은 ‘불가능’입니다. 혹시 병상에서 1년 정도 누워있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병상의 1년도 굉장히 긴 시간인데, 38년은 엄청난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절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7절에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자신은 시도조차 못 하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지금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들어갈 수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실패를 자주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떤 것에도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계속 실패가 반복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패보다 실패의식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당장의 문제 해결에 급급하고 멀리 내다볼 시야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굳어질 대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전신 불구가 된 경우, 부상 후 1-2년이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행복에 대한 기대치가 원초적 수준으로 떨어져서 마음이 드러누워 어떤 희망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만성 의욕상실증에 걸립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립니다.

그런 병자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너무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물음은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38년 동안이나 병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물으셨으니까요. 38년이나 병으로 누워만 있던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병이 나아 새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의지’ 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그의 말 속에는 두 가지 생각, 불평과 핑계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38년 동안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불평이고

둘째는 항상 자기보다 한발 앞선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겼다는 핑계입니다. 그는 의욕상실증뿐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와 매사에 불만 불평하는 병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병자에게 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질문은 당연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8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상태가 어떨까요? 1,2년도 아니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성적인 병자로 살아온 사람들도 예전에는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무언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기대가 무너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반복이 38년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만성적인 절망과 실패는 스스로 자기는 안 된다는 결론을 가집니다.

 

Ⅲ. 사랑하는 오늘 이 명절에 최대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으로 들어갈 힘조차 없는 자신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니? 그건 불가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묻습니다. 오늘 이 절망촌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분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 주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네 자리’가 무엇일까요? 병자가 38년 동안 깔아뭉갰던 자리입니다. 원망과 탄식이 베여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자리를 치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런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나를 주저앉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힘들게 하고 변화 없이 살게 했던 운명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38년은 얼마나 억울한 시간입니까. 자리를 깔고 막연하게 도움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것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도박과 같습니다.

우리 삶은 요행이나 다른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인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막연한 기대감이나, 나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 원망과 불평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집’에서 누가 먼저 들어갈 것인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그 모든 것이 종결될 줄 믿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나는 너를 낫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한다면 내가 낫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낫기를 원하고 변화되기 원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변화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자기 인생에 결론을 내려버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인생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충분히 열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낫기를 원하고 변화되고 새롭게 되길 원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인생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생으로 이끌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모든 것을 맡기고 역사해주시기를 원하는 갈망을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마음껏 역사하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절은 복음을 들려 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어쩌면 한 가족이지만, 오랜 세월 떠나 있으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가족끼리 만나 함께 옛날을 회상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여러분의 가족의 고통을 아시나요?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며칠 전 광주에서 삼성 이사로 있는 제자 한 사람이 왜 우리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냐고 울먹입니다. 고등부 때 회장하던 아이가 정말 사업도 미래도 있던 형제인데 자실을 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가여웠습니다. 겉으론 성공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그렇습니다. 어떤 인생의 짐도 심지어 내가 내 힘으로 벗어 던질 수 없는 죄 짐도 그 분은 당신이 나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죄와 범벅이 되어 사는 나로 하여금 그 죄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새 삶을 살게 하려고!!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베데스다 연못가 5채의 행각처럼 우리 삶의 주변에는 신음소리와 고통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길 건너 저편에서는 명절을 즐기기 위해서 떠들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거룩한 찬송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곳 -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바로 그곳에서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찬송소리가 들릴 가망성이 전혀 없는 곳, 38년 동안 웃음소리를 잃어버린 채 신음소리만 가득한 곳,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절망의 자리만이 가슴 가득이 밀려와 있는 그 곳 - 바로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사람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절망 촌을 희망 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도 명절 가는 길에 한 영혼을 주목하고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셨다면 이제 여러분의 명절은 어떻게 보내시려 합니까? 가족끼리 정말 행복한 시간 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가슴 안에 담겨있는 생명의 복음의 보혈이 흐른다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선물도 중요하지만, 복음의 선물을 들려주면 어떨까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복음의 빚진 우리에게 너는 정말 한 생명을 주니께 인도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하는 나에게 향한 질문은 아닐까요? 이 좋은 명절 날 우리 역시 가족과 그리고 친지 더 나아가 이웃에게 예수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신이 나지 않습니까? 생각만해도 가슴이 벌렁거리지 않습니까?

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믿지 않는 부모님에게, 친지와 고향 친구들에게 가서 전하십시오. 이번 명절이 여러분이 가는 곳에 복음의 향기가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명절 문화를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주 앞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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