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 - 바울 롬1:1-7. 2019. 2/17.
옥한흠 목사님이 어느 한 프로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질문자가 ‘옥목사님 목회자로서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여러분은 언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목사인 저에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저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변화고 열매가 나타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옥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목회자로서 제일 행복한 것이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아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 자체가 나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해’
그런데 질문자는 집요스럽게 또 질문을 합니다. 그럼 교회가 성장하고 사람이 변하고 열매가 맺는 것 그게 행복의 요인은 아닙니까? ‘좋기야 좋지 그걸 싫어할 목회자가 누가 있겠나 그런데 그건 내 관심이 아니야’ 질문자에게 또 묻습니다. ’목사님은 만약에 열매가 안타나면 어쩌시겠습니까?, 열매가 안 나타 날 수도 있지, 그렇다고 그 목회는 실패 한 건가,꼭 꽃을 보고 열매를 봐야 성공한 목회자인가?‘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게 있었습니다. 열매가 있다 없다가 아닙니다. 성장이 된다, 안된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내가 주님 앞에 바르게 쓰여 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스테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외진 산골짜기에서 2-30년을 10명도 안되는 그 영혼들을 붙들고 물러서지 않고 목회하는 목회자는 진 것입니까? 패배한 것입니까? 실패한 것입니까? 누가 감히 그런 판정을 합니까? ‘너 몇 명 목회하다 왔니?그거 하나님 전혀 관심이 없어요, 법대로 경주 했는냐’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한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똑바로 길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길을 잘못내면 따라가는 모든 양떼들이 죽어요, 죽습니다. 우리가 맡은 책임이 어마나 중요합니까? 참된 지도자는 길을 바로 내는 것입니다. 열매에 관심두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 몫입니다. 내 목이 아닙니다.
Ⅰ.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자신이 한때 씨를 말리려 했던 그 예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바울 시대에는 ‘종’은 아주 경멸스럽고,말하는 짐승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뿐만이 아니라 서신서 곳곳에서 자신을 종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냥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의 반란과 신성모독의 죄로 사형당한 청년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사형수로 얼마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여 그의 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이 뻔합니다. 로마에 의하여 가장 큰 죄인으로 정죄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간 바로 그 예수. 너희들이 그토록 부끄럽게 여겼던 예수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의 종이다. 자신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말한다면 내세울 것이 상당히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자기가 누렸던 유대인이라는 자부심과 배울 만큼 배웠다는 학벌,그리고 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의식을 가진 자입니다. 일찍이 바울은 위대한 석학이요 귀족이었습니다. 당당히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나 바울은’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야기 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이는 그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앞에 서게되자 지금까지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바뀌어집니다. 큰 자 사울이 아니라 작은 자 바울로, 로마 시민권자 귀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당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내겐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희 로마가 십자가에 매단 그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다. 로마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그 이름, 사도 바울은 그 이름을 무한히 자랑합니다.’ 로마가 부끄럽게 여겼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에게는 무한한 자랑이 되었던 것입니다.
Ⅱ. 오직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의 소망이 무엇입니까?“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뜻입니까? 여러분, 사도가 무엇입니까?그분이 보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뽑은 12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은 살아계셨다. 그분이 분명히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를 복음의 대사로 파송하셨다. 나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불렀다. 그분이 나를 보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할 자신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보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바로 사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부르심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단어 하나하나를 보면 놀랍습니다. 로마서에는 단어 하나, 전치사 하나도 놓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의 소명의식이 넘쳐흐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밀착 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떼어내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바울 안에 넘쳐 흐르는 열정과 생명을 건 투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의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소명감에서 나오는 힘은 대단합니다.소명이 뚜렷할수록 선명한 인생이 됩니다. 선이 굵고 선명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확실한 소명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점이 잘 맞춰진 렌즈로 사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삶의 시작은 소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부르심이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굶어 죽게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정확하면 그 인생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정확한 부르심이 없다면 헷갈리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이 있다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열심히 살고 성실하고 바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쁘냐, 누가 그 일을 하라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백 명, 천 명이 의기투합해서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날 하기 싫으면 그만둘 것입니다.삶의 동기가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감정에 따라 굴곡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이 정확한 사람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르심이 지워지기 전에는 그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서의 삶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신적 소명에 근거한 삶은 생명을 거는 삶입니다. 부르신 분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삶이 단순합니다. 부르신 자에게 집중하고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분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삶의 근거가 바울의 삶을 변화하게 하고 자기 삶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바울이 가진 것 중에 하나만 있어도 대단하다고 할텐데 그는 그 많은 것을 다 버리고도 이렇게 행복자의 외침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부름 받았다는 것, 내가 쓰임 받았다는 것, 그 때문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 그분이 누구시길래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왜 바울은 그리스도만이 복음이라고 합니까?왜 그리스도가 복음이 됩니까?
첫째, 성경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초점은 그리스도입니다. 2절에「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 1:2)」 참 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는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절대적인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자가 과연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절대적인 기준도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구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것에 대해서 예언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경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관심을 가져야 할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스토리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관되게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 집중했습니다. 신약 사복음서의 기자들의 일관된 초점은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이 세상의 책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 교리는 구원의 사건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육신 하신 예수를 믿지 못하면 다른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요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보세요, 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요셨습니까? 그 높은신 영광의 보좌를 왜 내려놓으셨나요? 바로 죄인인 나를 위해서입니다. 누가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나요?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죄 없는 사람이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고, 동정녀를 통해 나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자로서 중요한 조건을 갖추신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인간의 육체에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치러야 할 죄의 대가는 무슨 사상이나 철학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예수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신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예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사건만으로 끝났다면 복음은 미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확정시켜주셨고,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싸늘한 땅에 묻힌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실패하고 별일을 다 당해도 죽음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것은 역전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저주가 끝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소망이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이 주어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잠깐 동안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나무에서 잘려진 나뭇가지가 처음에는 푸른 잎사귀가 붙어있고 생기가 있어 보이지만 며칠만 지나면 완전히 말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강한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희소식, 위대한 기적이 있을까요? 인간을 뒤덮고 있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 이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그 당시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복음이 핵폭탄처럼 터져서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꿈꾼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그의 존재 이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0: 2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사명이 있음을 늘 깨닫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말합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지금 이 메시지는 1차적으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요, 2차적으로는 이 아침 모인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오프라 윈프리일 것입니다. 타임지가 금세기 미국을 움직이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1위를 했습니다. 이분의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이 1400만명이 넘습니다. 이분이 어떤 책을 읽었다고 소개하면 그날로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분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자기 나름의 네 가지 인생철학을 써놓았습니다. 그 인생철학은 성경에서 배운 것이랍니다. 특히 모세를 통해 배웠답니다.
1.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2. 남보다 더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위로해주고 봉사해 줄 수 있 기 때문이다.
3. 남보다 더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그 꿈을 이룸으로써 사회와 이웃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남보다 더 부담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부담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트리는 이렇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늘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이 하나만 있어도 남부럽지 않을 것을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기 단 하나의 생명을 드릴 수 있었던 사람. 노년의 그 혹한기에 외투 한 벌이 없어 추운 겨울을 지냈던 사람, 오히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 한분, 그분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나는 종입니다. 나는 종이라는 것을 자랑했던 그 바울이 그립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