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복음 롬1:14-17. 2019. 2/24.
오늘날 자본주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제 빚은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2018년 3월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국가부채는 약 1,556조원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부도사태가 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한사람이 태어날 때 그 순간 개인 빚이 2700만원을 떠안고 태어납니다. 이것 해결하지 않으면 파산을 합니다. 이 빚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채무의식은 굉장한 부담감입니다. 형제간의 채무도 스트레스가 매우 큽니다. 빚은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빚을 갚지 못하면 종이 되기도 했습니다. 빚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적 억눌림을 말합니다. 빚을 많이 지게 되면 일종의 죄책감까지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빚에는 강한 구속력이 있습니다. 빚을 진 사람이 빚을 모두 갚았을 때 그것만큼 반가운 것이 없습니다. 그때 찾아오는 자유함은 대단합니다. 이처럼 빚이란 우리에게 무거운 단어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바울은 자신을 ‘빚을 진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빚을 져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빚에 쪼들리기 시작하면 사람이 꼴이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까? 특별히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의 채권자가 나옵니다. 14-15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여기 나오는 채권자들은 바울에게 빚을 빌려 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이전에 바울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한순간에 인생이 뒤집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순간에 그는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영광의 빛 앞에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것은 바울에게 엄청나게 크고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눈이 열리고 자기 삶의 길이 바뀌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서니까 자신이 그동안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알게 됩니다.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의 죄를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생명의 빚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한마디로 빚갚는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를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과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한 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전 9: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집니다.
도대체 그 복음이 어떤 것이기에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까? 그 답이 17절에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하나님의 의’란 무슨 말입니까? 롬1:1-17절까지 읽어보면 복음이란 단어가 무려 일곱 번 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 - ?유앙겔리온? 이 말은 ?유? 좋다 ?겔리온? 소식이란 뜻입니다. 바로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Godspell - 좋은 이야기, 복된 이야기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인지 아십니까? 바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처럼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까? 지금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가장 큰 고민이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고, 롬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죄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고통과 죽음이 온 것이 아닙니까?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롬3:10,12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철 스님은 고행에 도가 튼 사람입니다. 결혼 직 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수행을 했습니다.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처에 철조망을 치고 10년 동안이나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답니다. 16년 동안 쌀가루와 솔잎가루만 먹고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 않고 자면서 수행을 했다고 하니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서 수미산보다 더 높다. 산채로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가 푸른 산에 걸려 있다." 한평생을 후회하는 말인데 그 속에는 구원받은 자의 소망이 없습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수행을 쌓아도 결국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함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이후로 난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 이 죄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누려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의 함으로, 노력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데 바로, 이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롬 3: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절에 보면 그 ‘하나님의 의’가 나오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복음이란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신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속성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공의요,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 앞에 죄인은 어느 누구도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합1:13절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죄인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누가 그 앞에 감히 설 수 있나요? 누가 그 앞에 감히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다 공의 앞에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평생선입니다.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신 공의와 사랑의 완성의 현장이요, 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 구원을 얻는 자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의로움을 입은 자들은 이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울이 이 은혜 앞에 설 때 16절에 보면 그는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자신이 한때 교회를 무너뜨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했던 그였지만, 그는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자신이 보아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세상에 대해서 기죽지 않는 당당함을 가졌습니다. 바울의 고백 안에는 거대한 로마의 문명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당당함이 보입니다. 그처럼 당당할 수 있었던 힘� � 무엇입니까? 바울은 세상에는 복음이 없다는 것, 보이는 세상의 허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번영하고 성공하고 화려해도 거기에는 인간을 구원할 복음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로마의 화려한 문명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로마의 힘을 이용해 복음을 증거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능력’은 헬라어의 두나미스입니다.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두나미스는 긍정적인 면에서 폭발력입니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꾸어놓는 초강력 파워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암이 낫고, 사업이 부도 직전에서 회생하는 것도 좋은 간증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적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랬습니다. 손톱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종교적으로 똘똘 뭉쳐 있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졌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한번 경험하면 기가 막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소망이 없던 우리 가정에 복음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바뀔 줄 믿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기쁨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의심하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확인할 때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장 흥분되고 신나는 일은 복음이 전달될 때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말씀이나,
기가 막힌 입담으로 화려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복음을 전하기만 했는데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복음의 위력을 경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술과 담배로 인이 박혔는데 교회에 나온 첫날 뒤집어져서 새로운 삶을 삽니다. 깨어지기 직전의 부부가 마지막으로 나온 예배에서 복음을 듣고 변화가 일어나 손을 잡고 돌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울증을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던 사람이 단 한 번의 예배에서 복음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탕의 길을 걷던 청소년이 복음 앞에서 뒹굴며 깨어지는 것을 볼 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비장의 카드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능력,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망가져도, 아무리 소망이 없는 인생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 영적으로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송장과 같이 기능 마비가 된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 것이 복음을 통해서입니다. 복음이 한 번 역사하면 기가 막힌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한번 밀려오면 인간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장을 흔들어 놓기 바랍니다. 너무나 초라하고 미미했던 변방의 소수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복음이 마침내 로마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파워를 과소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뒤늦은 나이에 예수를 만난 후 ‘막 쩌낸 찐빵’이라든지 ‘예수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이유’라는 책으로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만재라는 분이 얼마 전에 한 신문사에 이런 고백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 그것은 예수를 믿기로 한 일이다.” 여러분, 그는 50살이 넘도록 예수를 안 믿은 분입니다. 아내와 결혼할 때 교회에 나가겠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끌려서 교회에 다녔지만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순교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뻥도 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 "목사 양반이 멀쩡한 것 같은데 참 거짓말도 잘하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를 향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 먹이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그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자기 인생의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한 찬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50여 년이 다 되도록 자신이 한 것은 세상에 속해서 세상 방법대로 세상에 취해서 살아온 것뿐인데 자기가 어디가 예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은혜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자기가 이제는 자신의 인생 송두리 째로 다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기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가장 큰 기쁨이 있다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싶어서 애를 쓰는데도 결국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 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지 못한 복음을 듣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것 가졌다는 행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세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자랑입니까? 혹시 세월이 흐르고 나면 빛이 바래고 사라져 버릴 자랑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무엇이 자랑입니까? 여러분의 가정 안에 복음을 붙들고 있고, 복음이 자랑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가정은 지금 형편이 어떠하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는 좀 못해도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붙들고 있다면 그 아이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교회가 소망이 있습니까? 복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교 회는 하나님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혹시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감동도 없고 기대도 없이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까?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신자가 되기도 하고 불신자가 되기도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대일로, 정면으로 경험하기 바랍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기 바랍니다. 하루를 믿어도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바라고, 일평생 파고 또 파도 끊임없는 복음의 광맥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그 복음 안에서 황홀하고 기뻐하고 신바람 나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짓눌리거나 기죽지 않고, 복음 가진 자로서 당당함을 누리면서, 어디를 가도 이 땅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며,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