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신앙을 극복하라 롬2:17-29. 2019. 3/31.
지금 우리가 로마서를 대하고 있지만, 저의 심정은 솔직히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하는 마음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고 의사로부터 안 좋은 결과를 들을 때, 심정 같습니다. 마치 암이다 하는 진단을 받는 심정입니다. 저와 성도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고통스런 말씀을 계속 대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검진 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계속 보는 로마서 1장과 2장의 흐름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마치 칼로 쪼개듯이 명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가 우상 숭배자요, 각종 불의를 행하는 자요, 그래도 남보다는 선하다고 하는 교만을 가진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감히 ‘아니요’하고 대들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에 수긍을 하지 않는 일련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일지 모르나 자기만은 아니라고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 시간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백성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선민으로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도와주는 분이지, 영적으로 구원해 주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분으로 생각지는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1-3장에서 복음을 떠나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이란 표현을 썼는데. 상당히 선동적인 표현입니다. “당신이 그 대단한 유대인이라구요. 그러면 한번 따져 봅시다”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인’ 대신‘그리스도인’을 넣어 읽어 보면 이 구절이 좀 더 실감나게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이 그 잘난 그리스도인이라구요?” “당신이 그 유명한(?) 동성교회 교인이라구요?” 하는 약간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17-20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열거하면서 21절부터 사도 바울은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무슨 말입니까? 율법을 받았다는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면서 당신들도 도둑질하고 간음하며 신전의 물건을 훔치고 율법을 어겨 하나님을 욕되게 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한마디로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새긴 우상에 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 안에 숨어 있는 권력욕, 소유욕, 명예욕, 쾌락과 지배욕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마음으로는 우상숭배자라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도둑질, 간음, 우상숭배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함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도 했고, 광야에서도 모압의 여인들과 간음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어기면서 남들을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태도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하는, 명백히 잘못된 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자랑을 멈추라고 책망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율법이도대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율법은 우리의 비참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먼저, 이 율법을 살펴보면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적극성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데 그 목표와 기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롬7:7절을 보십시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를 들면 내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은 탐심이 죄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타난 죄는 도둑질하고, 사기하고, 간통하고, 거짓증거하는 것이지만, 율법은 그 죄의 본질은 바로 인간내면에 깊이 뿌리 박힌 탐심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여러분, 요즘 개들도 신경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개들이 정신병 약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즘 집안에서 강아지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사람 이상으로 귀하게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강아지들이 자기들이 사람인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울을 보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개입니다. 그 순간 개는 헷갈립니다. ‘내가 사람인가 개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이 강아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혼란이 생겨 신경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웃자고 말들어낸 이야기입니다.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를 건져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율법은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전에는 몰랐는데 이 율법의 거울 앞에서 비로서 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이 주는 고통
어찌 이 뿐이겠습니까? 롬7: 9-11절을 보시면 율법이 주는 고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할 때는 누구든 적당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간음죄를 저지르지만‘그래도 옆에 있는 저 친구보다는 내가 깨끗하지’라는 생각으로 위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할 때는 내게 주어진 힘을 가지고도 적당히 사기 치고 협박을 해서 검은 돈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보십시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됩니다. 양심에 호소하는 법이 나를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식한다고 해서 쉽게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죄는 과거처럼 적당히 넘어가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공격해 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왕 버린 몸, 하고싶은 대로하자’는 식으로 막가는 인생길을 걷게도 합니다.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어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 바울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전문적인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빌3:5에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로운 잣대로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의를 외치며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신이 굉장히 의롭고 정의로운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겉으로는 간음이나 살인이나 부정을 하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과 남을 정죄하는 마음, 심판하는 마음으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늘 쫓기듯 살아갑니다. 불안해합니다. 정의로운데 불안합니다. 진리를 말하는데 불안한 것입니다.
이런 영적 고통과 갈등을 바울은 오래 전에 겪었습니다. 그가 율법 앞에 서서 율법을 지키려고 뼈를 깍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했던 고백을 기억합니까?“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와 같은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역사상 가장 주님을 사랑했고, 그 말씀을 신뢰했던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느끼는 좌절감이 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행할 능력이 없구나! 어쩌면 이렇게 나는 좌절된 인간이냐? 어쩌면 이렇게 거꾸로 된 인간이냐?’고 고민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존경과 칭찬과 신앙이 좋다는 말을 하지만 나는 나만이 아는 절망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 무력감, 육체로서는 도무지 주의 계명을 따를 수 없는 좌절감, 그리고 애쓰면 애쓸수록 고통이 더해지는 이 아픔이 바로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율법의 기능은 나의 죄에 대한 비참함을 깨닫게 하고 거기에 대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기능을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율법이 갖고 있는 이 깊은 진리를 모르는 체 남을 판단하고 정죄 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이게 어찌 유대인들의 문제만이겠습니까? 우리들 역시 교회를 다니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적 사고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3. 율법은 죄인인 나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최종 목표가 있습니다.
갈3:24에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죄 아래 있었듯이 이제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죄에서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을 가졌다, 율법을 지킨다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나의 죄를 깨닫고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할 때 오는 그 비참함과 연약함이 있지만 그때마다 여러분은 다시 한번 구원을 상기시키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명심하십시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죄 아래 있었듯이이제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할 때 오는 그 비참함과 연약함이 있지만 그때마다 여러분은 다시 한번 구원을 상기시키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명심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바울은 지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바로 이면적 유대인임을 이야기 합니다.28-29에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참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신앙인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표면적 그리스도인이고 또 하나는 이 면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표면’, ‘이면’ 어떻게 다른 거죠? 한문이죠? ‘표’자는 ‘겉 표’자이고 ‘이’는 ‘속 이’자입니다. 표면이라면 바깥, 드러난 쪽, 사람이 보는 쪽, 이것이 표면입니다. 이면이라고 하면 안쪽, 내면, 사람이 보지 못하고 은밀히 하나님이 보시는 곳, 믿음의 뿌리가 단단히 밖혀 있는 것, 이게 ‘이면’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표면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면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면적’인 면에 역점을 두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드러나는 일, 어떤 사역적인 일만 역점을 두는 그리스도인이 참 많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찾으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이면적인 일에 역점을 두는 사람을 들어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 역시 교회를 다니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적 사고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외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의 외식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과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다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 홀로 있을 때의 모습, 주일의 모습과 월요일 아침의 모습,집 안에서와 교회에서의 모습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과 실제 나의 모습의 간격을 좁혀서 점점 일치를 이루는 작업이 평생 우리가 해야 할 영적 순례에서의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간격이 너무 크면 굉장한 위선이 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내면에는 죄책감과 수치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좀 더 그럴듯한 모습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것 중의 하나가 종교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열심을 냄으로 내 연약함을 숨기는 도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굉장한 충성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자 하는 노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신앙을 가지려면 외식주의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신앙의 외식주의와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모든 행위가 허위에 빠지고 자기를 기만하고 남을 속이게 됩니다. 결국 외식으로 거짓된 가면 속에 숨겨진 자아는 하나님과 진실한 대면을 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점점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결국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은 신앙이 됩니다. 외식은 신앙이 안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왜 그렇게 맹렬하게 비난하셨고, 죄인과 세리는 거부하지 않으셨을까요? 죄인과 세리들은 자기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가면을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눅18장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을 보게 됩니다. 이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릅니다.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나는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받칩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열리지 않고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 내가 매우 괜찮아 보이고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성전에 올라간 세리를 보십시오. 그는 율법 앞에 자기가 얼마나 탐심의 노예가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그 죄의 모습 앞에 절규하고 있습니까?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이 고백은 율법 앞에 눈이 열린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표면적인 사람입니까?아니면 이면적인데 역점을 두는데 많은 관심을 갖습니까? 우리는 이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15:31절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9:23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습니까.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신앙의 내용을 채우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영적인 부도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감탄하시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늘려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 얼마나 좋은 말을 하느냐의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위와 노력들, 신앙적 경력과 과거의 헌신들, 어떤 것이라도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오직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자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허영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고 주의 공로를 의지해야만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헛된 자랑으로 나를 부풀려 신앙이 겉으로만 요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함과 진실함이 드러날 때,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는 향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