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석에 앉은 인간 롬3:9-18. 2019. 4/7
언젠가 ‘우리나라 대통령의 결산’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위임 당시에는 국민적인 영웅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미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이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난 후, 그 역시 저격을 당해 부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마약에 빠져 여러 차례 구속이 되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가 끝난 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고, 노태우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IMF라는 오점을 남겼고, 차남인 김현철씨가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도 노벨 평화상도 받았지만, 두 명의 아들이 각종 이권청탁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기간을 마치지 못한 채 자살로 인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명박 대통령도 피고석에 나와 재판을 받고 지금은 보석 중에 계속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탄핵 소추안이 가결됨으로 우리 헌정 사상 초유에 집권 중에 대통령직에서 파면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피고인으로 재판 중에 있습니다. 참 이런 일들을 겪는 우리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새삼 권불십년(權不十年)!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10년을 못 간다고 말이 실감이 납니다. 한나라를 통치하던 분들이 이렇게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는 모습은 참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오늘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바울은 모든 인류를 법정에 피고인 석에 출두 시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10절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여기 성경에서 의인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죄에 관한 한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해부도와 같습니다. 바울은 11절 이후부터 피고석에 앉은 죄인에 대한 판결문을 읽고 있습니다. 이것을 읽다보면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 불쾌해질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내 죄목이 조목조목 열거된다면 기분 좋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죄인의 실상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죄로 인해 망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망가져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의 본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1. 우리는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로마서가 다루는 첫 번째 믿음의 주제는 죄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첫 번째 관
문이 죄문제라고 봅니다. 그것이 롬1-3장까지 나타납니다. 그런데 순서가 재미있습니다. 1장은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2장은 유대인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3장에서 죄를 모든 사람에게 확대합니다. 9절입니다. 롬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모든 사람이 죄아래 있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아래”는 헬라어로 “휘퍼”입니다. 이 “휘퍼”는 다만 공간적으로 아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배한다는 개념입니다. 누구 누구의 지배하에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11절 이후부터 피고석에 앉은 죄인에 대한 판결문을 읽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깨닫는 자가 없다는 말은 영적인 깨달음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지식이나 정보는 넘치지만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무지합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인데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건강, 정치 이야기를 하면 흥분하다가도 영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하품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죄인의 모습이고, 죄의 결과입니다. 영적인 기능이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12절에도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했습니다. 인간들이 다 치우쳐 살아갑니다. 치우쳤다는 것은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빠졌다는 것입니다. 기차가 레일을 벗어난 것을 탈선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평안의 길, 축복의 길을 거부하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원적으로 맛이 간 우유를 의미합니다. 쓸모가 없는, 버려야 하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선을 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내적 동기를 보면 불순한 것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악한 것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한 정의를 내립니다. 인간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3-14절에서 죄인의 상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죄인의 증상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내면의 세계는 볼 수 없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언어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는 목구멍, 혀, 입술, 입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입은 악의 출입구가 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유대지방에는 무덤이 열리기도 했는데 그 안에는 악취를 내뿜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국민 일보 ‘삶의 창가에서’란 칼럼에 실린 내용입니다. 저자가 서울 대학병원 특실에 입원하신 연세 높은 어른께 문병 갔었는데, 그는 외교관 출신으로 ‘신사 중에 신사’였고 점잖고 예절 깍듯한 분이셨답니다. 그런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 분의 부인이 황급히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미리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 대사님께서 쌍욕을 하시더라도 놀라시지 말고 양해해 달라’하더랍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사람을 보면 덮어놓고 욕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육십 평생 욕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안했을 뿐더러, 남이 욕하는 걸 보는 것조차 질색하던 분이 입에 담기도 민망한 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남부끄럽고 죄송해 죽겠다고 부인이 탄식을 했답니다. 그러자 간병인인 여자가 정신을 놓아버린 뒤 저렇게 욕이나 하는 환자는 아주 양호한 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로 대학병원 특실의 상류 사회 환자들에게 고용되어 사회적으로 유명했던 분들을 많이 간병했는데 그들 중에 얼마나 해괴한 환자가 많았는지 어느 분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물어뜯는 분도 계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마구 욕하고 싶고, 마구 물어뜯고 싶은 욕구가 그토록 강렬하게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평생 억누르면서 산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은 ‘죄’라는 단어를 쓰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죄를 교육의 부재, 인격의 미성숙이라고 봅니다. 환경론자들은 나쁜 환경과의 접촉, 곧 후천적인 것으로 봅니다. 사회학자들은 죄를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전쟁과 사회적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온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죄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 곧 선이 부족한 상태가 곧 죄라고 말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심리학적 입장입니다. 심리학은 죄를 말하지 않고 죄의식, 죄책감을 말합니다. 죄라는 단어를 “상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상처는 회개할 필요가 없고 그냥 덮어주고 싸매주면 됩니다. 상처는 주로 인간관계에서 옵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 나쁜 영향을 받았다거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갈등등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 어느누구도 예외없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2. 죄는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째서 이처럼 단호하게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죄의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에서 지적합니다. 18절에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 하나님을 모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모르니 두렵지도 않은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쌓인 가인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하던 다윗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궁중의 밀실에서 통정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용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지의 까닭 없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주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떴습니다만, 이 영의 눈이라는 것은 너무 예민해서 자칫 잘못하면 흐려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감길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을 보세요. 죄란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롬 1:28절에 말씀처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 없이 살려는 것,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죄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단어 가운데 “이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으니 간섭하지 마세요.“ 멋진 단어같지만, 얼마나 무서운 함정이 있는지 모릅니다.
20세기의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라브리 공동체를 섬긴 “프랜시스 쉐퍼는 ”20여 년 전 책을 쓰면서 “21세기가 오면 사람들은 목적 없이 돈을 벌고/ 진리 없는 교육을 하고/ 의미 없는 사랑을 나누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그렇지 않나요? 가만히 보면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리를 따르지 않고 역리를 따릅니다. 성적 관계는 정상적인 남녀의 결혼 제도 안에서 신성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인간이 임의로 무시하거나 깨뜨리면 불행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해서 탈선을 시도합니다. 욕망하는 대로, 결혼제도 밖에서 저지르는 수많은 범죄들, 음란하고 타락한 문화들이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3. 죄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성경은 죄를 들추어내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갔을 때 진단을 하고 수술을 하는 것은 살리려는 것이지, 배를 갈라 죽이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법정에 세우고 죄인으로 만들어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교회를 십년 넘게 다녔어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분이 꽤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교회만 다닌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에 누가 걸리지 않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는 말씀처럼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이 사망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말합니다. 죄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도 많지만 심판의 이야기도 수없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힘이나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스스로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쳐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도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선행으로도 철학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 피고석에 앉아있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피고석에 앉은 인간을 내려오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피고석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피고석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그 아들이 대신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위대한 반전! 복음은 기가 막힌 반전입니다. 완전한 죄인으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구출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흠이 없으시지만 죄인 취급을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도덕적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마 1: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죄의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넘겨졌고 그분이 모두 뒤집어쓰셨습니다. 홀로 그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8: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은 얼마나 귀한 복음인지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억누르며 과거로 이끌고 가던 그 모든 것의 줄을 딱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는 무죄다. 너는 깨끗하다. 너는 이제 해방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에 왕으로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죄가 뿌리는 악령의 권세에 우리가 놀아나지 아니하며, 죄가 사용하는 율법의 무기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공포를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이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선포하신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이 영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주인이었을 때 우리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똑똑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간은 홀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에게 속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속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무죄를 선고 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예요. 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시는 나의 왕이신 예수, 나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을 누가 정죄 하겠습니까?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정죄함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중 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 중 하나님 앞에서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고 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다 떠안으시고 내 인생의 가장 복된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도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제는 율법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마귀도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이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