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롬3:21-28. 2019. 4/14 주일 설교
저는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임종을 지켜보지를 못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군대생활 할 때, 돌아가셔서 발인을 할 때 장례에 참여할 수 있었고, 또 저희 어머니 최권사님은 요양병원에서 별세를 하셔서 임종을 지켜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면에서는 참 불효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이 땅에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 인생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마지막 유언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골고다 언덕은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습니다.(요19장)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그 신비스러운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쓴 잔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잔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담즙은 아마 혓바닥에 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더 알고 싶어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누가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하고 그를 항상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는 오늘부터 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하시고자 하셨나?” 잘못하면 진부한 질문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은 이미 교회학교 때부터 익히 듣고 잘 안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지고 그 답을 머리로 가슴으로 손과 발로 다시금 깊이 찾게 될 때 고난주간을 경건하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읍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Ⅰ.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여기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놀라운 상황 변화를 나타내줍니다. 지금 이전의 상황과 지금 이후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바뀐 상태를 말해줍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제는’ 이 but(그러나)로 나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는 반전입니다. 앞부분의 모든 상황을 뒤집습니다. 그러면 여기 그러나 전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롬 1:18-3:20은 그 동안 로마서를 9번에 걸쳐 보았는데 이 긴 논증을 통해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명처럼 받들던 율법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길이 없었지만 이제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영등포 신길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때 우리 집이 바로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던 그 지역에 살았습니다. 가끔 여의도에 가서 모래밭을 뒤지면 땅콩이 있어서 그것을 캐서 먹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강 건너 마포가 있었는데 버스나 그 옛날 전차의 종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포종점이라는 노래도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 때 마포대교가 공사가 시작 되었습니다. 강이 가로막아 영등포에서 여의도로 마포로 갈 수가 없었는데 이 다리가 놓여짐으로 영등포에서 여의도로 마포로 건너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열리자 여의도에 비행장이 사라지고 대대적인 개발이 시작되어 국회의사당도 생기고 서울의 맨하탄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마포 대교가 개통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습니까? 길이 열리니까 엄청나고 놀라운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제는’ 이란 말을 통해 우리 인간이 그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지만, ‘이제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가로막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한 의가 누구입니까? 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예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느누구든 다 차별이 없이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여전히 죄 속에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여기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 팀 켈러목사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의로와지려는 것은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가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수영을 못합니다. 또 한 사람은 수영을 좋아하고 꽤 수영실력도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국가대표 수영선수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첫 사람은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익사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처음에는 꽤 나가더니 얼마가지 못해 허우적거리다가 바다에 가라앉았습니다. 수영 선수는 4.8km 지점에서 지치기 시작하여 6.4km에서 힘이 소진되더니 8km 지점에서 익사했습니다.’ 수영실력은 다르지만 태평양을 건널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와 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적절한 표현입니다.
Ⅱ. 우리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 ‘속량’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아고라조'라는 단어는 '장터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사다.'라는 의미입니다. '엑사고라조'라는 단어는 ‘몸값을 지불하고 산 노예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는다.’, '브이'라는 단어는 '그곳에 돌아가지는 않지만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완전히 해방시켜준다' 는 의미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방되어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 이것이 속량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속량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범죄한 이후에 구원의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명예와 생명과 재산보다도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소망을 붙들고 있습니까? 물질을 잃어버리면 영원도 함께 잃어버린 자처럼 낙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면 구원의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함께 잊어버린 것처럼 절망하고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관계와 건강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는 이 구원의 소식과 소망과 기쁨도 모두 함께 잃어버린 것처럼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붙잡아야할 소망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할 소망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소망을 다시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은혜 앞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선물은 우리 편에서는 그냥 주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어마어마한 자기희생의 결과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꼭 명심 해 두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아닙니다. 거기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십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인간이신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요, 하나님입니다. 사람이요,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신 사람이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요, 하나님이신 분이 그곳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신비한 연합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형벌을 자기가 내리면서 그 형벌을 자기가 담당하는 신비스러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Ⅲ.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주님이 그토록 바라신 것은 바로 회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입니다. 회복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의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고후 5:17)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삶에 드러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죄 사함에서 끝나지 않고,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하게 되는 단계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하나님이 디자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서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고 풍성한 것들을 드러내기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죄에 빠져서 불행하게 저주 아래 살아가던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이끄시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전에는 왜 인생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이 많은지, 허무함과 불안함을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잊기 위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무능력함과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타내신 그 의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기만하면 새로운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여기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여기 ‘그러므로’는 우리의 구원이 바로 율법이나 어떤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 이 믿음은 쉬운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가 왕 王인가?’ 아니면 ‘로마 황제가 왕王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주목 해야 할 부분은 “믿는 자 마다”라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믿는다’ 말은 헬라어 원문성경에서는 ‘believe’라는 단어에 ‘in’을 함께 사용하는데, 이 동사구는 ‘believe’라는 동사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believe in’은 믿는 자와 믿는 대상의 관계를 중요시한 구절입니다.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영접하여 자신의 삶의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다시 태어나는’ 소위 ‘중생’하는 것이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때, 믿는 자는 의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웃 사랑의 열매도 맺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아닌 그저 ‘believe’하는 것은 교리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believe in’과 ‘believe’의 차이점에 대하여 야고보 사도가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약 2: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죽은 믿음이 바로 ‘believe’ 만 하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입니다. 약 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고 할 때는 ‘in’이라는 전치사 없이 believe만을 썼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압니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떱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한 사람이 세례 요한 다음에 누구신지 아십니까? 거라사의 귀신들려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막 5:6-7절에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귀신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지적으로 동의하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과 함께 갑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로 묶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가?” 그 의미를 깊이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한 번 올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분의 얼굴을 우러러 보십시오. 당신이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로 가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두 가지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입니다.
십자가는 몇 마디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 은혜를 다 알려면 죽을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들고 이 놀라운 은혜를 알아 보려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둔감해 진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어디에다 마음을 다 빼앗기고 십자가의 은혜 앞에 둔감해집니까? 무엇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여러분의 마음은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서 십자가가 멀리 보이게 되었습니까?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으라는 말입니다.
갈보리로 올라갑시다. 예수님이 핏자국을 남기면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십자가 옆에 조용히 서서 그분의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을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