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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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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1 부활 신앙 나의 신앙 (고전 15:12-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9-04-21 | 조회: 808

부활 신앙 나의 신앙 고전 15:12-19. 2019. 4/21.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만왕의 왕이십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요바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으신 것 같지만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에서 다시 사신 이 일처럼 우리에게 기쁨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그러므로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감격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참 많다는 겁니다.이유는 다양합니다성적 합리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단 말이냐이런 이유로 거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고린도교회도 그랬습니다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너희 중에는 말은 세상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말합니다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그뿐만 아니라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사치부도덕과 음란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그런 세속화의 한 복판에서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그러니 이 세속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곳에서 먼저 복음을 받아 들였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왜냐하면 자기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먼저 복음을 위해 살다가 간 자들과 자기 또한 얼마나 비참한 자가 되것인가를 피를 토하듯 증거하고 있습니다. 19절 보십시오'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여러분 바울이 누구입니까우리가 아시다시피 그는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그는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시켰으며심지어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 무서운 핍박자였습니다여러분이런 자가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참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했기에 헬라의 문화와 철학그리고 로마의 정치와 법에 익숙한 ?을 살았습니다또 그는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어떤 사람은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사기도 했지만 태어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대단한 가문의 배경도 있었다는 말입니다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그는 최고의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교회를 핍박하게 된 것은 그냥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을 섰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에 모든 생을 걸었습니다그는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정도로 생각했습니다예수 믿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예수 믿는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습니다사실 그는 이러한 열심은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이처럼 도저히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생을 송두리째 변케 한 사건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이 가졌던 세상적인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 온갖 고난수모를 겪었습니다결국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순교를 당합니다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우리는 어떻습니까이렇게 칸타타로 준비하는 사람들그리고 그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산에서포천에서 저 용인에서 이곳 저곳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신 분들이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이유가 무엇입니까바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 예수님을 무덤에다 쳐 넣었습니다그리고는 큰 돌을 굴려 가지고 그 어구를 막았습니다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가장 세도가 당당하다는 빌라도의 어인을 가지고 봉인까지 했습니다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군사들을 동원해 밤낮 없이 지키게 했습니다그 순간을 보면 죽음이 이긴 것 같습니다그러나 사흘만에 그 무덤에 갇혀있던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죽음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죽음이 손을 쓸 수 있습니까다시 살아나는 자 앞에 죽음이 힘을 쓸 수 있습니까지키는 것도 헛수고요인봉 해 놓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요아무리 군사를 동원해도 다시 상황을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한 주간 새벽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은 향나무처럼 사셨습니다향나무는 찍혀도, 찍혀도 향을 발합니다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을 발라줍니다향나무는 흉기를 향기로 바꾸어줍니다예수님의 향기는 용서의 향기였고 사랑의 향기였습니다축복의 향기였고 인내의 향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흉기가 향기로 바뀐 사랑의 현장이었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흉기로 찌른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경험한 우리에게도 삶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우리가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갖고 산다면,하나님의 참된 증인이요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 산다면 우리는 아직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하면서도 부활을 증인으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마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뵈었음에도갈릴리 호수로 고기잡이 하러 가겠다.’고 말한 베드로와 그를 따라 나선 제자들처럼부활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그거 아세요기쁨과 감격은 나누어야 커지는 것입니다아무리 큰 기쁨과 감격을 맛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가슴에만 남아 있을 때에는 결코 오래 가지 않습니다아니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부활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 가진 그 부활의 기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습니다매일 전쟁터와 같은 삶으로 나가는 사람들에게도 그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필요합니다그리고 이미 인생의 고통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과 감격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내 주변을 돌아보세요고통 가운데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신음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공감할 수 없는 아픔의 깊이가 있습니다다른 사람의 아픔 앞에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말을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지금 그들이 당하는 그 고통이 우주보다 커서 다른 어떤 사람이 당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힘들어!’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그 말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이 될 수 없습니다함께 아파하는 것만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과의 전쟁을 치르며 살고 있습니다. 생존경쟁이라는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공부라는 괴물과싸우며 매일 전쟁터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도 있습니다취업과 정규직이라는 승리를 위해서 전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세상의 부조리로 인해서 고통당하며힘겹게 그것들에 맞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들에게 우리의 기쁜 부활절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겠습니까부활절이 우리에게만 기쁨의 잔치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 바울을 보세요그가 왜 부활 신앙으로 한생을 변함없이 산 줄 아십니까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사도 바울은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열정을 다했습니다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그렇게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거야!’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사도 바울의 고백처럼내가 열심히 하긴 했지만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야!’ 이게 신앙인의 고백입니다이것이 부활 신앙의 정수입니다

 

  오늘날은 자기중심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입니다. ‘라고 하는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면 성공할 수도 없고, ‘라는 존재를 내 스스로 높이지 않으면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어졌습니다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그런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세상은를 드러내야 성공하고 를 드러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유혹한다 하더라도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은혜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 내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삶도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살아갑니다그러므로 어떤 형편에 있든지 이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사탄이 마치 제철을 만난 듯이 이리저리 교회를 흔들고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며 사회도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사건들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어떻게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불길을 피해 나오는 선량한 주민을 칼로 찔러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참아 입에 담을 수 없는 사건 사고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삶이 날마다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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