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한 것이 없어도 롬4:1-12. ⑩. 2019. 4/28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가지고 3장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은 이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내가 천국에 가려면,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보다 착한 일을 더 많이 하고, 구제사업도 하고, 봉사도 많이 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자랑할 만하고, 내놓을 만한 것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이렇게 착하게 살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누며, 고아와 과부를 돌봐주고, 고난 받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데모도 하고, 때로는 정의를 위하여 감옥에도 가면, 그런 일들을 통해서 공덕을 쌓아 마침 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불교가 그렇고, 로마 천주교회가 그렇게 공덕사상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롬3: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8절에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느니라”그런데 바울의 이런 설교를 들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울의 이 설교에 대해서 의심 내지는 항변을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믿음의 조상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니, 구약성경에 나타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았어? 그런데 믿기만 하면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말도 안돼” 이렇게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대해서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예화를 듭니다. 여러분도 느끼시지만, 설교에 중요한 요소가 많지만, 특별히 중요한 요소가 바로 예화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 회중들의 눈동자가 조금 풀렸다가도, 예화를 들려주면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사들에게 소개한 달라스 신학교에 하워드 헨드릭슨 교수님은 좋은 예화를 써온 학생에게 그 자리에서 상급으로 100달러를 주셨다가 합니다. 이처럼 하신 이유는 신학생들에게 설교에서 예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흔히 우리가 설교의 황태지라고 일?는 찰스 스펼젼은 설교를 집, 예화를 그 집의 창문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창문 없는 집에서 살수는 있겠지만, 살면서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예화 없는 설교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 역시 설교를 준비할 때 적절한 예화를 찾는데 시간을 많이 투지합니다. 어떨 때는 며칠이 걸립니다. 가르침의 대가인 바울 역시 이 예화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지금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 유대인들에게 예화를 꺼내 듭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율법 이전의 인물이자,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율법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다윗이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설명하므로, 행함을 주장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는 이 말씀은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은 바로 창15:6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나가 밤하늘을 가리키시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되리라고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5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 말씀은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한 절의 말씀 속에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믿음” “의” “의로 여김”(칭의) 이라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갑니다. 그 때 나이가 75세입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자신의 태에서 후손이 없습니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그런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밖에 나가보니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5:5절에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손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이 85세가 될 때까지 자식 하나 없던 노인에게 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아지리라고 말씀하다니, 이것이 도대체 믿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5:6절은 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신약 엡2:8-9절 말씀이 해석해줍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근거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의 통로입니다. 믿음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신약의 해석입니다.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믿게 하신 것이고, 믿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득에 굴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구원받은 것입니까? 은혜로 받은 구원입니까? 이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두 번째 예화에서 아브라함으로 충분치 못하다면 다윗은 어떠냐고 말합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 4:5-6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여기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원리입니다. 롬 4:4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세상에서는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나 일을 하고 삯을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는 법칙은 공짜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철저히 계산이 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도 그것은 언젠가 갚아야 하는 빚이지 은혜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편 32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7절에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여기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라는 표현은 수동태입니다. 자신이 한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는데 사함을 받았습니다. 여기 ‘가려주셨다’는 의미가 참 재밌는 표현입니다. 이는 ‘의의 옷으로 덮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입혀주신 그 의의 옷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를 보실 때 죄인으로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십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합니까? 그도 우리처럼 몸과 마음이 타락한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간음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고, 살인죄를 범했으며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등 그야말로 십계명의 모든 죄를 다 범하고 말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그의 죄를 지적하자 얼마나 회개 했는지 모릅니다. 시51편에 보면 침대가 다 젖도록 후회하며 애통합니다. 그는 자신의 지은 그 죄를 한 톨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음란과 살인죄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고통과 괴로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의 행위로 어찌할 수 없었던 그는 드디어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후회가 아닌 처절한 회개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선언을 듣습니다. 그것은 그의 죄가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의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무덤에 갈 때까지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의 죄를 그 죄에서 구할 수가 있습니까? 행위입니까? 노력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주의 은혜만이 그의 죄를 가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선한 행위로도 우리가 지은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존경하는 다윗도 결국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언약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 선 다윗을 신약에 무엇이라 말씀을 합니까? 행13:22절에 말씀을 보면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인물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다윗이 행위가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 선언입니다. 누가 토를 달거나 재심을 요청할 수 없는 완전한 판결입니다.
복음서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께 붙잡혀 왔을 때 모두가 돌을 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땅에 글을 쓰시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다 도망을 쳤습니다. 어떤 해석으로는 예수님이 땅에 죄목을 썼을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한다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들킨 죄인과 안 들킨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의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내가 받은 구원은 내가 완벽하고 잘나서 율법대로 살아서가 아닙니다. 내 못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믿음없이 늘 실수하고 넘어져도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택한 내 인생 절대로 용도 폐기 처분용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 이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죄를 또 짓고 짓는다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은 나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그 신분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당당함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흔들릴 때는 십자가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어떤 것으로도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살다 보면 죄를 짓게 되고, 불안해집니다.
특히 사탄이 “너 또 죄지었지? 그러고도 직분자야? 그러고도 교회 다니냐?”, “그러고도 예배를 드리냐? 너가 그러고도 구원을 얻을 것 같으냐?”라며 계속 우리의 행위의 문제를 가지고 흔듭니다. 놀라운 것은 행위를 건드리면 흔들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한 것은 죄지은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나?”, “지은 죄가 많아서 안 될 것 같아. 이런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라고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의로운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행위의 문제로 흔들리거나 쩔쩔 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결코 값싼 은혜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니님의 자기 희생입니다.
멀린 케로더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유명한 책을 쓰신 분입니다. 그 책을 보면 이 목사님은 인생의 굴곡이 많은 생을 살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울 정도의 과거를 가진 분입니다. 그는 감옥을 마치 자기 집을 드나들 듯이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생활을 하던 중, 한번은 모범수로 가출옥 혜택을 받아, 잠시 동안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감옥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점차 다가오자 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가출옥 기간을 연기해보려고 담당검사를 찾아갔습니다. 검사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그는 깜짝 놀라면서 “아니, 당신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검사는 말하기를 “멀린 케로더스씨, 축하합니다. 투르먼 대통령께서 당신을 특별 사면했소. 당신의 모든 전과기록이 말소되었으니, 이제 나가서 새사람으로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는 처음에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일한 것이 없었지만, 무조건적으로 사면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죄과는 말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동성교회 성도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다 이루었다”고 “내가 너희의 죄값을 다 치루었고, 너희의 모든 죄는 사면되었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서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좀 떳떳해지면 나가겠습니다. 지금은 부끄러워서 못 나가겠습니다”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지금 나아오십시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부끄럽지만 염치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 나오는 당신의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롭다 여겨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해 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어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가올 50주년 기념 예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내가 받은 그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이젠 세상적이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순종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갈급함이 일어납니다. 바로 나를 구원하신 그 예수를 전하고 싶습니다.
한생명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다. 이제 나아가 그들에게 이 복음을 외치십시오. 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해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다만 우리 주님의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오라고 전하십시오. 사 55:1,3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오직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그렇습니다. 목마른 그들에게 전하십시오. 여기 동성교회에 영원한 생수가 마련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수는 값없이, 돈없이, 일한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임을 전하십시오. 다만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일한 것이 없어도, 그들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된다는 사실을 전하십시오. 일한 것이 없어도 말입니다. 아무 것도 일한 것이 없어도 말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