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진 자가 미래를 본다. 창37:5-11. 2019. 5/26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올해 성년이 되는 청소년들은 2000년생 63만 여명이라고 합니다. ‘성년의 날’은 만 19세인 청소년이 사회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새로운 권리와 의무, 책임을 지며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한마디로 이제 성인으로서의 삶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성년의 날에 제일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성들은 시계라고 합니다. 그냥 시계가 아니라 명품 시계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가방인데 이것도 명품가방을 선호했습니다. 사실 세월이 가도 이 성년의 날에는 장미, 향수, 키스 세 가지 선물을 하는데 장미는 ‘열정’, ‘사랑’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어서 성인이 된 젊은이에게 무한한 사랑과 열정이 계속되길 바란다는 의미고 향수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향기를 풍기는 좋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키스는 책임감 있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에 청년으로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사라지고 젊음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포기’라는 단어가 청년들의 삶에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학자들은 청년 세대를 ‘포기 세대’라는 용어로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 등장하다가 또 ‘오포세대(삼포에다가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세대)’ 그리고 ‘칠포세대(오포에다가 인간관계와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 나왔고, 심지어는 ‘올포세대(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오늘 이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섰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그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들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게 많이 들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희망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은 사람, 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인생, 여인의 유혹을 이긴 남자, 그리고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입지전형적인 인물, 등등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불렀는지 아십니까?
Ⅰ. 꿈꾸는 자라고 말합니다.
창37:18-1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요셉을 가리켜 ‘꿈꾸는 자’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요셉, 그는 꿈꾸는 자였습니다. 형제들도 아버지도 모두 알았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자다. 저 아이는 꿈꾸는 아이다. 꿈속에 살고 있는 아이야.꿈을 이룰 아이야.’ 라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꿈을 먹고 산다는 것, 꿈을 위해서 뛴다는 것,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희망찬 삶을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꿈이 큽니까? 그 사람은 대인입니다. 꿈이 작습니까? 그 사람은 소인입니다. 꿈이 고상하면 그 사람도 고상하고 꿈이 천박하면 그 사람도 천박해집니다. 꿈이 선하면 삶이 선해지고 꿈이 악하면 삶도 악해집니다.
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5-9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여기 요셉은 열 일곱 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밭에서 열 한 단이 일어나 자기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났는데 열 한 별이 자기를 둘러서서 절하는가 하면 해와 달도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열 일곱 살이면 아무래도 아직도 어린 티를 벗지 못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특히 막내나 다름이 없는 처지어서 어리광도 많이 피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꿈을 꾸자 너무나 흥분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런 꿈을 꿨다고 막 자랑하고 그럽니다. 그 꿈 내용을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듣는 사람은 굉장히 기분 나쁜 꿈입니다. 꾼 사람은 신이 나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 나쁠 수 밖에 없습니다. 열한 단이고 열한 개의 별이면 자기 형들이 자기에게 절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한다면 틀림없이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에게 절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호통을 맞고 나중에 형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미움을 받다가 드디어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기구한 운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생애입니다.
Ⅱ. 그러나 요셉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분명히 다짐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꿈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러분, 꿈은 값을 다 갖고 있습니다. 꿈에는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어떤 꿈이든 값을 치러야 합니다. 큰 꿈이면 그 값이 비쌀 것입니다. 작은 꿈이면 아마 그 값이 조금 쌀 것입니다. 그 꿈이 특별히 고상해서 많은 사람이 감히 꿀 수 없는 그런 독특한 꿈이면 아마 그 값은 대단할 것입니다.어떤 꿈도 값이 없는 꿈이 없습니다. 꿈은 큰데 싼값으로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꿈을 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에는 외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꿈이라는 것은 할인매점도 없습니다. 일단 내가 꿈을 찾았고 그 꿈을 성취하기를 원하면 그 꿈의 값에 따라서 내가 희생을 치러야 되고 내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달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이 얼마나 비싼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어떤 값을 치루든 그 값을 치루는 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값을 치루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강요당해도 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값을 치룰 각오를 하십시오.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 때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어서 매일 밤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그는 단 한 시간의 문학수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 중퇴생 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 수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절망의 길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도 원망의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쓸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자리에서 구덩이에서 끌려나와 은 20개에 노예 상인에게 팔려 애굽으로 오게 됩니다. 그 때 나이가 17세입니다. 구덩이에서 건져진 그였지만, 지금은 낯선 이방 땅 애굽의 한 노예 시장에서 자신을 사갈 주인을 기다리는 기구한 운명에 빠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찌 그뿐입니까? 노예로 팔려간 집에서 신임을 얻어 이제 좀 살만하니까,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성폭행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꼼짝달싹도 못한 채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악명 높은 애굽 왕 바로의 지하 감옥에서 짐승보다 못한 생활도 했습니다. 요셉의 일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기구한 인생입니다. 그는 꼬일 대로 꼬이고, 비틀릴 대로 비틀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도 ?요셉이 좌절했다, ?요셉이 고민했다?요셉이 낙심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만한 인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요셉이 낙심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셉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Ⅲ.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원치 않는 상황 가운데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상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계획과 전혀 다른 상황과 맞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은 항상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도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 17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집 주인 보디발이 그를 가정총무로 세웠습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의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에도, 그는 가정총무로써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요셉을 소개할 때마다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섬겼다’는 단어입니다. 39:4절에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리고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여기 ‘섬겼다’ 히브리어로 ‘솨하’는하나님께 예배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요셉이 자기 상전을 적당히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듯 그렇게 섬겼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항상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있는 곳에서 주님께 하듯 최선을 다해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같은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보세요. 그는 비록 형들의 미움으로 노예로 애굽에 팔려갔지만, 13년 만에 그는 상상도 못하는 신분 상승이 일어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결국 그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성취합니다.
요셉은 그 복을 가는 곳 마다 나누었습니다. 옥에서도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었고 (창39:22) 관원의 꿈을 해몽하자 얼마 후 복직되고(창40:21) 요셉은 왕에게 인도함을 받습니다(창41:14). 왕의 꿈을 해몽하여 위기에서 총리자리로 올라갑니다(창41:32-41). 나라를 치리할 때에도 곡식을 저장하여 7년 기근 속에서도 백성들을 살려내어 온 나라가 그를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형제들과 아버지를 살려낸 것도 그를 통해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이 임종할 때 요셉에게 안수하며 축복한 내용을 보면(창49:22-25) “요셉은 샘 곁에 심겨진 무성한 가지라,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전능자가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의 크기가 샘 곁에 심겨진 나무처럼 무성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울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울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주변이 얼마나 풍요로와 졌습니까? 요셉의 이름은 "하나님이 더 하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우리 동성의 청년들 그리고 영적으로 늘 청년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의 삶의 향기가 주변을 풍요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청년 여러분! 그리고 교우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값을 치루고 있습니까?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던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 헬렌 켈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이 없이, 비전이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역시 힘들고 어렵습니다. 직장에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부정적인 보입니다.불가능한 상황이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신호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도 큰 강물이 흐르는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은혜와 궁휼을 입은 사람은 캄캄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장차 회복시켜 주실 축복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오늘 예배 참여한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