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부흥을 꿈꾸는 공동체 겔47:6-12. 2019. 5/26. 주일 설교
다음 주면 우리 교회가 창립 50주년을 맞는 뜻 깊은 시간을 갖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시 교회를 선택한다면, 어떤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교회를 선택하고 싶습니까? 각자 한번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를 택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병을 안고 씨름 하는 사람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준다면 얼마나 반가워하겠습니까?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낙망하지 마세요. 하면서 소망과 희망을 주는 교회로 인도한다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게 하고 또 그들이 세워지고 세상에 이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서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교회가 세상 앞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97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번째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만여 명의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에스겔의 나이는 약 25세 정도였습니다. 25살 젊음의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의 마음속에는 온갖 의문과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일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심을 받은 우리 민족이 이토록 참혹한 일들을 겪어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신 분일까? 혹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버리셨거나, 아니면 잊으신 것은 아닌가? 정말 우리 조국 이스라엘은 영영히 멸망당하고 말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포로로서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그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피가 끓어오르는 그 나이에 남의 나라 포로로 잡혀와 모든 희망을 잃고 지내던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포로로 끌려간 지 5년 만에 칡 흙같이 어두운 한 밤에 어두움을 가르고 하늘이 열리며 한 줄기 빛이 절망하는 한 젊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찬란한 비전이, 이상이 내려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변화시켰던 이 위대한 비전, 이 찬란한 이상이 어느 날 그발 강가 포로수용소에 있던 젊은 포로, 제사장의 후예였던 에스겔에게 임하자 그는 이 환상을 붙들고 새로운 새벽을 향해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겔에게 보여준 이 환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는 에스겔의 이 환상 속에서 우리가 도전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Ⅰ. 생명 운동이 바로 교회에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1-5)
오늘 겔47장으로 오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의 환상을 보여 줍니다. 먼저 환상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립니다. 현실의 삶이 힘들고 미래가 불확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만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환상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비전(vision)’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비전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은 우리의 꿈과 계획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우리에게 비전으로 주십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야망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꿈입니다. 그런 꿈은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약 교회가 태동할 때 하나님은 당시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엘서에 나타난 놀라운 메시지를 주십니다. 행2: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환상을 보든, 예언을 하든, 꿈을 꾸든, 이 세가지 표현은 한 가지 의미를 삼중으로 표현하며 강조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본문에 에스겔이 본 환상이 무엇입니까? 1절에 보시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하나님은 에스겔을 환상가운데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에 도착했을 때 성전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 성전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 겔47:2절에 보면,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 에스겔이 본 것은 생수였습니다. 맑고 시원한 생수가 성전 문지방에서 똑똑 ‘똑똑 떨어지며 이것이 ‘졸졸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에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환상을 보여준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강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1천척씩 4번을 척량을 하게 하십니다. 3-5절을 보세요.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여기 일천척씩 4번이나 척량하니 처음엔 물이 발목에 오르고, 그리고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니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스미어 나온 물이었는데 나중에는 창일한 강을 이루었습니다.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나게 물이 불어서 헤엄을 쳐야지 만 건널 수 있는 수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미래를 상실한 한 그발 강가 포로수용소에서 손발이 다 묶인 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에스겔에게 보여준 환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성소에서 흐르는 이 생명의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전은 곧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 사도 바울은 고전 10:4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은 요7:37-38절에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미약하고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힘을 얻고 강력한 말씀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은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절 “스미어 나오더라.”는 표현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성전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장애물이나 방해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장애물도 말씀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2.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살리는 역사가 있었습니다(6-8). 6-8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 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여기 성소에서 흐르는 생명수가 동쪽으로, 아라바 쪽으로 흘러갔다는 말은 생명이 아닌 죽음이 지배하는 황무지 쪽으로 흘러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는 마침내 바다, 즉 사해(死海)에 까지 도달했습니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보통 바다는 염도가 약 4-5% 정도가 되는데 사해의 경우 그 6배인 25% 정도가 됩니다. 염분이 지나치게 많아서 물고기들이 살 수 없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둥실둥실 뜹니다. 계란의 3분의 1정도가 저절로 뜹니다. 염기 때문이지요. 사해는 또한 요단강을 비롯한 주변의 작은 강들로부터 끊임없이 물이 흘러 들어오지만 유출구(流出口)가 없어서 물을 내보내지 못합니다. 사해가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라는 사실입니다. 물을 받기만 하고 내보낼 줄 모르는 탐욕의 바다입니다. 여기에 물이 흘러가니까 놀라운 생명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해에 생수가 흘러 넘쳐서 죽음의 바다를 살립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령님은 에스겔에게 불가능한 현실을 하나님은 능히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을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뒤 덮을 때,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생명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성령의 능력이 나를 덮어, 온 땅으로 나아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생수의 강이 온 땅을 적신다는 것은 이 땅에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교회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은 위대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게 될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백성 거룩한 백성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표가 어디 있어요?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고통 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까?
Ⅲ. 에스겔이 본 환상은 오늘 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너무 필요합니다.(9-12) 여기 9절을 보십시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 성령의 능력이 나를 온전히 뒤덮어 우리가 주의 일을 하게 될 때 모든 것이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여러분이 하는 사역은 능력을 얻게 될 것이며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가정이 살아나고, 사회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성령님은 우리가 이 단계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의 것은 무익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모세에게서 하늘의 능력이 흘러나오자, 바로가 모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올 때, 애굽의 최고 권자(權者)가 모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세상이 무릎 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충 믿으면,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 무릎 꿇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있는 척 행동하지만, 세상에서는 세상에 무릎 꿇습니다. 돈의 힘 앞에 무릎 꿇습니다. 가진 자 앞에 무릎 꿇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머리를 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는 하늘의 영권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자가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말이 되면, 세상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나갑니다. 놀러 다니고 술 마시러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들로 산으로 가는 것과 교회로 가는 것 이상의 구별되는 것이 없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취미활동을 하고, 우리는 신앙적인 활동을 하는 것일 뿐, 차이점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월요일에 직장에서 만나면,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마시고 노느라 얼굴이 까칠하고, 우리는 철야기도 하여 얼굴이 까칠합니다. 둘 다 활동하는 것일 뿐, 별 차이가 없다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매력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믿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매력적인 것이 많습니다. 즐겁게 해주는 것이 많습니다. 파워도 많습니다. 돈은 대단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에서 부활을 경험합니다. 돈을 가지면 전지전능한 신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집에서 모이고, 우리는 교회에서 모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권세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믿는 만큼의 믿음도 갖지 않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는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을 봅니다. 죽은 바다가 소성함을 얻고 그 결과 심히 많아지는 것이 세 가지가 생기게 됩니다. 첫째는 강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아집니다(7절). 둘째는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9절). 셋째는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아집니다(10절).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고기 한 마리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큰 고기로 넘쳐나고 강 좌우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로 가득하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입니다.하나님께서 왜 선지자에게 이러한 광경을 보여 주셨을까요? 죽음의 바닷물이 살아나 물고기와 생물들이 살게 되고, 그 주위에는 각종 나무들이 자라서 철따라 실과를 맺으며, 그 잎사귀까지 약재로 쓰이게 되는 경이로운 광경을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바벨론의 속국으로 전락해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강력한 바벨론 군대의 발굽 아래 짓밟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선지자 역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입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현실은 죽음의 바다인 사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되던 그 바다가 살아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생수가 흘러들어가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 반해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이 있습니다. 11절.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진펄과 개펄은 생수가 미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아주 대조적이죠. 한쪽에는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고, 다른 한쪽에는 비참한 죽음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우리 인생에 성령의 생수가 흘러들어오느냐, 아니면 흘러들어오지 않느냐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리얼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걸 가리켜 ‘그림 언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듯이 환상을 통해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생명이 약동하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를 거부하면 성령의 생명력을 받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믿으면서도 이런 생명의 풍성함을 체험하지 못하고 진펄과 개펄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시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성령의 생수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생수로 인해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생명의 바다가 펼쳐져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목마르십니까? 힘드십니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말씀의 깊이를 누리면서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지금 이미 여러분들은 깊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퍼 마시면 됩니다. 성령의 신비에 젖어 사시길 바랍니다. 말씀의 깊이를 체험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은혜의 깊은 단계에 들어가 보시길 바랍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말씀의 생수가 지금 우리 가운데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부흥을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 새벽부터 ‘세상을 향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란 주제로 모여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새벽에 모이십시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적은 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물이 되어 사막과 죽음의 바다까지도 생명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말씀과 은혜의 강물이 우리를 통해서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찬 우리 광진구에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 한강의 물줄기를 거룩한 보혈의 강으로 만들어 이 땅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의 꿈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