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며 삽시다. 롬5:1-4. 2019. 6/16. 주일 예배
요즘 우리는 참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휴대폰입니다. 어디를 가나 이것이 누구하고나 연결해 줍니다. 지구촌 어디를 가든지 말입니다.요즘 축구 열기가 2002년을 방불할 만큼 대단합니다. 얼마 전에 상암 경기장에서 한국과 이란의 경기가 있었는데 60000만면의 관중이 일제히 핸드폰을 열어 조명을 키는데 얼마나 멋있는지 감동 일색입니다. 핸드폰은 동영상이나 사진을 바로 전송을 해 주기도 하는 등 대단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통화도 동영상으로 얼굴을 보면서 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몇십 년 전으로 거슬러 가면 전화기가 있는 집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희가 어릴 때에도 하얀색 전화기가 있으면 그 집은 부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집에는 전화기가 없었습니다. 가끔 전화기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습니다. 급한 일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전화를 해야 하는데 사정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급한 일이 생기면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칩니다.전보를 칠 때는 비싸기 때문에 길게 쓰면 안 됩니다.가급적이면 압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핸드폰으로 언제든지 위급한 상황이면 연락이 가능합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 핸드폰을 잘 누리면 과거에는 상상도 못하는 편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 계속 살펴보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았는가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비극의 이면에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의 삶을 다 망가뜨렸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이 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내면 깊숙한 부분에 죄가 있습니다. 부부 갈등이 일어날 때 단순히 세미나나 어떤 카운셀러의 상담을 받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 내면 깊숙한 곳에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끝없는 불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나 친구와의 관계나 삶의 모든 관계 안의 불화 깊숙한 곳에서 사회학적, 심리학적, 때로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라든가 소통의 기술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습니다.우리 삶의 모든 것이 깨어지게 만들었던 가장 근원적인 것 핵심 안에는 죄의 문제가 있고 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깨어진 것 안에서 파생된 모든 문제가 오늘 우리의 삶의 불화와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관계입니다.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습니까? 관계가 좋지 않으면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불행한 것입니다. 좋은 직장에 취직했는데도 사표를 내는 대부분의 요인이 어떤 일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도 최고의 직장에 취직을 했는데 1년을 못 버티고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관계의 문제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관계를 풀어가는 가장 key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로마서 5장에서 보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원수가 되었던 관계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원수가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는 우리 삶의 어떤 관계도 어떤 문제도 근원적으로 풀릴 수는 없습니다.우리는 그동안 1-4장까지 살펴보는 가운데 핵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제 5장부터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어떤 결과들에 대해서 5장부터 시작됩니다. 본문 1절을 읽어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합니다. 여기 “누리자!”는 영어 성경에 보면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즐기자라는 말입니다. 좀 세속적인 표현 같지만, 이것은 특권을 이야기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아마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글을 쓸 때에는 흥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이 단절된 관계를 여는 가슴 벅찬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때 그 감정과 그 흥분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비극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글을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쓰는 이 바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끼며 알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율법 아래 있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 속에서 하나님께 간접적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 이 “누리자”라는 표현은 독특한 시대가 우리에게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누리는 것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화평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누린다”라는 표현은 특권입니다. 특권은 누가 누릴까요?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특권이 있는데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특권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미국에는 팔로스 버디스(Palos Verdes)라는 부자 동네가 있는데, 어떤 교민이 이민을 와서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 부자 동네에 수영장까지 있는 넓은 집을 사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바쁜 나머지 정작 본인은 그 좋은 집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작 그 집은 누가 누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집의 가정부가 아침에 출근해서 청소 한 시간 하고 빨래 걸어놓고 난 다음에 사운드 좋은 오디오로 한 시간 동안 음악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시간쯤 누워 잔 다음에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주스 마시고 나서 5시에 퇴근한다고 합니다.그러나 고생고생 해가며 화려한 저택을 산 이 집주인은 힘들게 일하다가 밤늦게 퇴근하니까 수영도 즐기지 못하고 텔레비전에서 한국 드라마나 보다가, 그 넓은 침대 다 놔두고 소파에서 잠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새벽같이 일어나 또 장사하러 나간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가정부는 또 출근해서 어제 미처 다 못 들렀던 음악을 듣고 또 수영하고 그 집을 즐깁니다. 그러면 그 집은 누구를 위한 집입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히4:16절에“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에서 담대하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간다는 것은 잘못하면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대제사장도 죽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만나면 죽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라고 합니다.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보좌는 두려운 곳인데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에서 ‘담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런 단어를 자꾸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들어갈 때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과정들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죽을 수 있는 그 두려움의 장소에 이제는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딱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입니다. 이 한 마디가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나의 행위와 조건과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열렸다는 것은 흥분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리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 안에 찾아오는 변화는 한둘이 아닙니다.하나님과의 관계가 꼬였기 때문에 모든 인생의 문제가 시작되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변화되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찾아왔던 우리 삶의 모든 고민과 아픔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확하게 해결되고 화평을 이루는 관계가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근본적인 매듭이 풀리면 파생될 수 있는 많은 효과가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근본적으로 묶여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려지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에 묶여있는 영역들이 있어서 절대로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용서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2-3)
2절을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enjoy, 누리자”고 하고 2절에서는 “즐거워하느니라”, 3절에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누리자” “즐거워하자”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가 가져다주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까?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 찾아온 비극 가운데 하나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죄로 인하여 우리가 망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스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코를 박고 이 현실이 전부인 것처럼 바라보고 살아가는 연약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가 없고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 있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고 영광이라는 사실 자체를 전혀 알지 못하게 합니다. 죄가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뿐 아니라 이 세상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조차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 망가진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되고 미래에 주어질 완성된 영광의 회복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손상된 우리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화되고 영화롭게 되는 멋진 회복의 장면들을 오늘 바울이 잠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3절에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 2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당하고 있는 환란보다 더 강력한 미래의 영광이 나를 사로잡을 때, 비록 환란 속에 있고 그 환란 자체가 고통과 어려움을 주지만 그럼에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이 상황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고 내 눈을 사로잡고 있는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하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먹구름 사이에 빛줄기가 내리쬐고 조금만 지나면 그 먹구름이 지나가고 찬란한 태양으로 가득 차게 될 소망. 믿음의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것입니다.
얼마 전에 김연아 선수가 오랫동안 쉬다가 공연을 했습니다.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연기를 얼음 위에서 펼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좋지만 본인은 얼마나 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고난의 삶을 살았겠습니까? 하나의 테크닉을 익히기까지 고난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고난을 견뎌낼 수 있습니까? 금메달을 딸 때, 단상에 올라가는 영광스런 그날이 없다면 왜 그것을 하겠습니까? 메달을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실의 짜릿한 유혹이 있지만 엄청난 자기 절제와 극복을 하는 것입니다. 숱한 날 눈물의 세월을 보내는 이유는 다가올 영광의 날을 너무나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리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관계 회복과 또 성도간의 관계 회복이 주어졌습니다. 여기 누리자는 명령형입니다. 당당하십시오. 지난 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누릴 수 있는 복을 받았지만, 그 복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에서는 장자의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팥죽 한 그릇에 이 장자의 특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축복을 지키지도 못하고 차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복을 놓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신 복까지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탄은 진리를 오해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미 기쁨과 평강을 얻었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10:10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주님께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양, 즉 주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더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풍성함이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이 시간 좌우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누리며 삽시다!” 다시 한 번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삽시다!” 우리는 지난 주 감격스러운5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1969년 6월에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작은 불씨가 타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이 불씨가 얼마나 큰 불이 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을 담아 쏟은 불씨는 지금의 동성교회가 있게 한 기초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내온 모든 시간을 돌아볼 때,믿음과 은혜라는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이제 이 누림을 가진 우리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이 진정한 누림과 즐거움을 가지게 되면 동성교회를 향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좋은 교회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여러분의 헌신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좋은 교회의 전제 조건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회의 공식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인생의 방황은 예수를 만나면 끝이 나지만,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이제 기도제목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성수주일은 우리 성도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청지기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물질생활에 인색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누림은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가족 전도, 이웃 전도로 한 사람이 한명씩 주 앞으로 나오게 하는 열정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계속 부흥하는 교회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