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사랑 롬5:5-11. 2019. 6/23 제12강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미녀 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한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명의 남자를 거치며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화려한 남성편력과 사생활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재산도 6000억원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고백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 얼마나 갈증이 일어났으면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외쳤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로마의 옥중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6-7).
사도 바울은 또 며칠 후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그리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평생을 그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면서도 불행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행복해했고, 감옥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장차 하나님의 상급을 그리면서 기대에 찬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거부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기 5장에서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이 글을 쓸 때에는 흥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이 단절된 관계를 여는 가슴 벅찬 이야기를 하기 시작을 합니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축복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때 그 감정과 그 흥분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비극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글을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쓰는 이 바울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느끼며 알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율법 아래 있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1절을 읽어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기 “누리자!”는 영어 성경에 보면 “enjoy"라고 표현합니다.즐기자라는 말입니다. 좀 세속적인 표현 같지만, 이것은 특권을 이야기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이 누림은 담대함입니다.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던 하나님이, 멀리만 느껴지던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보혈로 나의 죄가 씻겨지자 그 순간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이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여기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여기 말씀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란 의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잡고 사는 자의 소망은 결코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를 만난 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산 사람입니다. 당시 바울을 이해 하지 못한 자들은 바울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변론을 듣다가 행26:24절에 보면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다” 정말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거지처럼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 아니었겠습니까?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쫓겨나기도 수없이 했습니다. 죄수도 아닌데, 착고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 니다. 그러니 세상은 그를 부끄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미친 일에 감격합니다.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여기 ’부은바 되었다‘는 말은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고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핍박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3절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문제는 이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돛을 제대로 올리고 출항하는 배는 바람을 타고 안전하게 빨리 항해 할 수가 있지만, 돛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바람이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 가 버립니다.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더 전진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면 고난이 우리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크고 작음에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믿음의 태도냐, 아니면 불신앙의 태도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고난너머 펼쳐지는 하늘의 영광이 어떠한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먹구름이 끼어 있어서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먹구름 사이에 빛줄기가 내리쬐고 조금만 지나면 그 먹구름이 지나가고 찬란한 태양으로 가득 차게 될 소망을 믿음의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8: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 영광이 무엇입니까? 요1: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4)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 우리를 구원의 자녀 삼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성육신 하신 이것을 요한는 영광으로 표현합니다. 보세요.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해 씌여지는 표현이 6-1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 멈추어서 숨을 고르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6, 8, 10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명구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상태였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상태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6절에 연약한 상태였고, 8절에 죄인이었고, 10절에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인데 나를 위해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르므로 죄로 막힌 담을 헐어내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이제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프러포즈인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엔 조건이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입니까? 그분 앞에 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쏟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이 현실과 처한 환경 앞에 왜 이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분께서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세신바 된 그 뿐께서 나의 작은 신음 마져도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분께서 내가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가운데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5절에 바울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한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왜 바울이 예수를 만난 순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는지 아십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전에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억지로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사랑을 받은 자는 자발적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여인입니다. 그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제자들은 자시 곁에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현실 앞에서 조건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낭비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의 그 사랑의 깨뜨림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이야기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삶 속에서 헌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헌신은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사랑스럽고 멋집니다. 그런데 헌신을 해도 어색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헌신이 아니면 힘들고 지치는 것입니다.신앙생활이 우리 힘이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면 끝까지 가기가 힘듭니다. 핵심은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 먼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