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으로 말미암아 롬5:12-21. 2019. 6/30.
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주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는 다수의 원리를 내세움으로 우리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다보니 다수의 중요성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놀라운 변화는 바로 한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지금 미국은 영어를 공식 국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역사를 보면, 1776년 미국의 국어로 영어를 선택할 것이냐? 독일어로 할 것이냐? 를 놓고 투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표 차이로 영어가 결정되었습니다. 그 때 그 한 표 차이가 아니었으면 독일어로 가결되어 미국은 독일어가 국어가 되고, 세계는 독일어가 공식 통용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한 표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1645년 6월 10일 영국 의회에서 총사령관 투표가 있었습니다. 크롬웰이 총사령관으로 당선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91대 90 한 표 차로 당선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는 장면입니다. 1868년 앤드류 존슨 미국 대통령은 단 한 표 때문에 탄핵 소추에서 모면되었습니다. 1945년 텍사스 주를 미국 영토에 포함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를 놓고 미국 의회가 투표를 하였습니다. 한 표 차이로 미국 영토에 포함하도록 가결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만약 한 사람의 부표가 나왔다면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크고 자원이 풍부한 텍사스를 잃었을 것입니다.
또 영국의 챨스 1세를 사형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를 놓고 투표하였습니다. 135명 재판관이 투표에 참석하였습니다. 68대 67로 사형이 가결되어 챨스 1세를 사형시켰습니다. 한 표로 영국의 왕이 죽고 그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한 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류를 이처럼 비참하게 만드는 죄가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 왔는가를 말해주는 죄의 원인과 그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대표성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21절까지 보면, 유독 반복되는 단어를 찾을 수가 있는 데, 그것은 ‘한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12절, 15절, 16절, 17절, 19절, 계속 '한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대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오고,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Ⅰ. 한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알려줍니다.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특히 12절은 어떻게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인간이 왜 죽게 되었으며, 왜 세상이 이처럼 불행하고 파괴되었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창3장에 등장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죄의 세력이 이 세상에 작용됨으로 모든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가 인정을 하든지 우리가 인정을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원죄 아래에서 태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갇힌 인간의 불행한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원죄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대표의 원리에 의해서 마치 내가 한 것과 같은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일합방 을 했을 때 내가 직접 하지 않았지만, 대표가 조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영향 아래에 들어가 식민지 생활을 한 것과 같습니다. 한 순간에 우리 민족은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여기 17절에 보면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한 사람을 통해 사망이 왕 노릇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죄가 왕 노릇했다’는 말은 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 죄의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뒤덮고 있다는 죄의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죽음이라는 문제, 사망의 권세는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이고 온 인류를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는 잔인한 폭군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돈이나 건강이 빼앗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보다 더 큰 상실은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저주 중의 저주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죽음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이후에 찾아올 영원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계보에서 보통 출생으로 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긴 대열에 서 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여기에는 돈도 권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로 결론 맺고 끝이 났다면 인류는 절망적입니다. Ⅱ. 그러나 한 사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는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15절의 ‘그러나’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라는 뜻을 이야기할 때 쓰는 접속사입니다. 우리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망 가운데 발버둥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넘쳤으니라"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아무 소망도 없고 절망 가운데에서 살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처럼 인류 역사상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담 안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17절의 말씀에 주목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우리를 지배했지만,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통해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는 말은 이 세상의 죄로부터 주어진 사망의 지배, 죽음의 굴레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고 나의 생명이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나를 죽이려고 해도 더 이상 저주는 사라지고 영원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푸른 바다에 적조 현상이 일어나면 바다의 물고기 떼들이 떼 죽음을 당합니다. 적조 현상이 일어나니까 생명체들이 숨을 쉴 수 없고 흙을 붓지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죽음의 힘이 임하니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이때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면 한순간에 해결이 됩니다. 17절에 ‘더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풍성하게 흘렀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힘이 흘러 모든 인류를 쥐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압도적으로 역사하여 생명의 힘이 발동함으로 모든 저주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에 ‘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당하고 넉넉한 정도가 아니라 압도하는, 거대한 쓰나미가 밀어닥칠 때 아무도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것 같이 저주와 절망과 사망의 권세,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을 한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뒤집는 감격적인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은 좀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은혜를 받기위해서 죄를 많이 지을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에 찬물을 끼었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 죄가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죄로 인해 스스로 그 덫에 빠져 나올 수 없는 절망감을 줍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이 사실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둘째 아담이신 그 한사람 예수님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안에 잠겨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누리자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할 것이 없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누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써 우리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10여년전에 저 태안반도 쪽에 홍콩 선적 유조선과 우리나라 크레인이 해상에서 충돌하여 그 아름다운 바다가 기름으로 엉켰고, 이 기름이 해변으로 몰려와 생태계의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 교회도 사고가 난 며칠 후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4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기름 유출사고로 황폐화된 태안 해변을 다녀왔습니다. 실상은 뉴스를 보면서 안타까움만 있었는데 막상 그 현장을 가보니까 가슴이 매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잘못 때문에 만물이 탄식하는 것을 실감한 현장이었습니다.
마치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의 고통을 짊어졌듯이, 몇 사람들의 부주의로 인하여 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던 자연이 검은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서식하고 있는 철새들도 영문도 모르는 채 새까만 기름을 뒤집어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야 이유를 알고 당한 일이지만, 조개들이나 굴들, 또 바다의 생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숨을 쉬지 못한 채 대책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 그 현장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해변을 부산에서, 강원도에서, 서울에서,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로 꾸역꾸역 해안가를 메꾸고 있었습니다. 새까맣게 덮인 태안반도에 뒤덮인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봉사자들을 보며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아담과 같은 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의 갈래 길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 중요합니까? 한 사람 때문에 이 세계에 죄와 죽음이 들어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이 세상에 생명이 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한 사람으로 살아가시렵니까? 누가 그 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예수님과 같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지금 로마서를 써 내려가는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교회는 이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각자 피의 보혈로 적셔진 주의 자녀들입니다. 이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던 삶을 중단하십시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을 체험을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힘은 세상을 살게 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힘입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이 한해의 절반이 시작되는 7월입니다. 첫주가 맥추 감사로 교회가 지킵니다. 여러분, 지난 6개월 동안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닥친 어려움 때문에 너무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병으로 인해 고생 많이 하셨습니까? 가정이나 자녀의 문제로 속 깨나 타셨습니까? 장사가 되지 않아서 걱정도 많이 하셨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해서 밤잠을 설치셨던 적은 없으십니까? 그러나 이 시간 그 가운데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의 찬송을 부르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