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신 16:9-12, 16-17. 2019. 7/7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감사하는 마음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019년도 전반기를 결산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어떤 감사를 안고 이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가장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런 감사거리를 찾지 못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 중 중요한 명절 3개를 지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라는 3개의 명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늦은 가을이 되면 그동안 열심히 가꾼 올리브나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들을 풍성하게 소출하는 연말이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1년에 3번의 추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맞춰 큰 명절 3가지를 제정하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불행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 3절기를 제대로 지킨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찮다는 이유로 절기가 있다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백 년을 보낸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적절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를 밟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습관화 되도록 계속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될 것입니다.
Ⅰ.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왜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맥추절은 보리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함으로 드리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미래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파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게 될 것임을 미리 예언하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거칠고 황량한 광야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미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내 손에 아무 것이 없어도, 앞으로 받을 하나님의 복을 미리 바라보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 맥추절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430년 동안의 노예생활과 광야 40년 동안의 고난의 세월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시고, 힘들고 고통스런 광야생활 동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난 후 7주 만에 지키는 절기라 하여 칠칠절, 오십 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신령한 첫 열매,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애굽에서 나온 지 50일째 되는 날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그 백성을 광야교회로 조직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주님이 피로 값 주시고 사신 주님의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 힘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었고, 오순절 이후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성령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람들 안에 거하시면서 새 창조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 - 성령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마음에 품은 사람을 일컬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롬8:9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의미를 안다면 맥추절은 신약 교회의 탄생을 알릴뿐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는 정말 깊은 감사가 나오는 절기입니다.
Ⅱ. 이 맥추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는 고통으로 얼룩진 불행한 역사가 아닙니까? 애굽에서의 430년 동안의 노예생활과 광야 40년 동안의 고난의 세월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시고, 힘들고 고통스런 광야생활 동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나안의 풍족함에 빠져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에 ‘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 한마디로 사랑의 빚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말씀을 합니다. 16절에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①.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1년에 3차례씩 명절을 지키라고 당부하시면서 재미있는 명령 1가지를 주셨습니다. 곧 명절을 지킬 때마다 남자들은 하나님 앞에 와서 얼굴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킬 때에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들만 이렇게 보이라고 했을까요? 남자들만 감사하라는 말일까요? 언뜻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가정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와 얼굴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맥추절이 되면 곡식을 추수한 다음에 모든 가족이 모여서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데 대해 감사했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온 가족이 첫 농사를 짓고 그 열매를 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임을 가장이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 자녀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까요?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하기는커녕, 입만 열면 계속해서 불평을 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혔다고, 목이 마르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40년 동안 끊임없이 투정을 부렸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시편 107편 4-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야훼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방황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피곤한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때를 따라 먹여주시고, 마시게 해주시고, 원수들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요,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광야 같은 세월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 광야 같은 위기와 역경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도와 주셨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기를, 3번 절기를 지키면서 감사를 드릴 때 반드시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16절에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그리고 17절에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 하시면서 오히려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원인을 조사해 보면 1순위가 언제나 "교회에 나가면 돈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래전 종교 개혁자인 칼빈은 당시의 교회를 가르쳐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해 바른 이야기를 안하는 것이 문제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를 연구해 보면 그 비유의 절반이상이 돈과 관련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돈은 절실한 인간 현실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본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제물이라고 불렀는데 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 곧 희생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헌금의 성격은 어느 정도 희생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그것은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성의 없는 헌금행위는 우리가 받은 은혜가 마치 싸구려 은혜인 것처럼 은혜를 격하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순교자요 신학자였던 본 훼퍼 목사는 당시의 독일교회가 무력해진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전락시킨 것 그리고 희생정신을 상실한데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그러면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이란 희생만 하다가 마는 것이냐고 물을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생은 일종의 씨 뿌림과 같은 것입니다. 씨 뿌림은 땀흘림이요 희생이지만, 거기에는 열매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밀을 안다면 희생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바울은 고후 9장에서는 이것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고후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8절의 약속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은 결코 자학적인 희생이 아닌 기쁨의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Ⅲ. 맥추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특히 자체 소득이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 고아, 과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약하고 궁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외된 자와 함께 첫 열매를 나누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부합니다. 12절에서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한 때 애굽에서 약하고 궁핍한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는 내가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사는 약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물을 드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후8:9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모든 부요함을 버리시고 스스로 가난해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내가 가진 부요함으로 남을 또한 부요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을 하면서 고후8:5절에"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일차적으로 주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와 이웃을 돕는 일을 통해서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설악산의 울산바위의 그 엄청난 경관을 보여주는 그 산자락에 엄청난 산불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름드리 소나무가 불에 탄 채 힘없이 여기 저기 서 있는 모습이 당시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화재의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 산불로 인해 수많은 이재민이 생겼고 또 정부에서 최소한의 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상이 있고, 앞으로 회복이 있겠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재난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분들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 상처를 어떻게 위로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이 상처가 그렇게 빨리 치료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총회에서 우리 교단산하에 있는 크고 작은 교회들이 성금한 헌금 1억1만원을 피해 지역 교회 3곳과, 가옥이 불로 전소된 두 가정, 그리고 군부대 두 군데 극동방송 삼척 방송국을 돌아보고 예배를 드리고 그분들의 사정을 들어보고 모금 된 헌금을 나누어서 전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로 전소된 한 교회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신이 여기다 교회를 개척하고 16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마음을 안 연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너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도 불타고 교회도 불타지 않았습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전혀 마음을 안 열던 주민들이 함께 이 고난을 의논하기 시작했고, 목사님에게 와 상의를 하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다 잃었는데 웃으면서 이번 ‘산불 나서 수지 받은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지역 주민이 꿈쩍도 안하던 주민들이 교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불탄 냄새가 아직도 배여 있는 예배당에 모여 감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다 잃었는데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다녀본 모든 곳에 성도든 군인이든 목회자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 희망을 보고 감사하는 그 모습은 제가 오랬동안 잊혀지지 않을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흔히 문둥병이라고 말하는 나병(한센씨 병)에 걸린 사람들은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손가락이 불에 탈 때에고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 있다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사한다고 해서 우리의 환경이 바꿔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마음은 여유로워지고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에는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것이 감사가 주는 가장 큰 유익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자주 우리의 삶을 바꿔줍니다. 빈궁한 삶을 풍요로운 삶으로 바꿔주고, 힘든 삶을 기쁨으로 바꿔줍니다.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용기를 주고 활기를 주는 것도 감사가 주는 유익입니다.
여러분! 지난 6개월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고인이 되었지만, 미국의 경제학자 인 죤 갈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기에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의 시대’ 라고 말합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금융위기로 인해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남을 돕다가 빚보증을 잘못 서서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감사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한 삶을 살면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채 늘 불평 가운데 살다보면 오늘 내 삶에 주어진 은혜와 기쁨도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어떤 분들은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할 것 아닙니까? 어디를 보아도 나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어 ‘think'와 ’thank' 두 단어가 같은 어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양 사람의 유명한 경구에 ‘think and thank'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설교를 시작했을 때,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쓴 기도시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다시 한번 같이 볼까요?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