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그러나 이제는 롬6:15-23 ⑮. 2019. 7/21.
요즘 한국 교회에 성장을 방해하는 사건들 때문에 전도의 문이 막혀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한국교회의 이미지 실추입니다. 언론이 앞을 다투어 대형교회의 문제점과 목회자의 비리를 보도하면서 어느새 한국교회는 도덕적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한 공영 방송에서 대형 교회의 비리를 보노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산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이미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온라인을 중심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어느새 반기독교 정서가 확산되었습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 조장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사회의 탈종교화 현상입니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2015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처음으로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종교보다는 돈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이런 요인들은 점점 전도를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에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중에 버리더라도 일단 받아는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도지를 나누어주면 화를 냅니다. 과거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축호전도를 하면 많은 집이 문을 열고 응대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아파트의 경우 경비에게 알려서 쫓 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이 과거에 비해 전도하기가 힘이 듭니다. 교인들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점점 전도에 소극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도열매도 많이 줄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를 살펴보면 교회의 대외적인 환경이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우선 당시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정부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이나 용서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죽기를 각오한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누구도 전도하려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 믿고 교회에 나간다는 일도 큰 결단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칫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의 한복판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룩에로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은 우리의 신분, 즉 구원 이전의 모습과 구원 이후의 모습을 15-23절까지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말은 "전에는"이란 말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제"가 그 "전"과 같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전과 이제는 어떻게 다르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전과 이제에 각각 속하는 몇 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그토록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전과 이제에 각각 속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설명하는 말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15절에서는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먼저 "법아래 있음"과 "은혜 아래 있음"을 대비시켜 ‘전과 이제의 다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여기에서도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름"과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름"을 대비시켜 ‘전과 이제의 다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7-18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여기에도 "본래 죄의 종이었음"과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음"을 대비시켜 ‘전과 이제의 다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22절에서도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구원받기 전에 죄의 종으로 살아갔을 때 너희는 사망에 이르는 절망 선고를 받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도 "죄의 종이 되었을 때의 마지막인 사망"과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됨의 마지막인 영생"을 대비시켜 ‘전과 이제의 다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는 말로 다시 한번 "죄의 삯으로서의 사망"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생"을 대비시켜 ‘전과 이제의 다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5-23절까지 ‘전과 이제에’ 각각 속하는 몇 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용어들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그토록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예수 믿기 전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삶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바울도 지금 자신이 죄의 종이었던 지난날의 신분에서 의의종이 되었다는 이 신분의 변화 앞에 감격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의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종이란 말을 썼을까요? 우리나라 말로 종이라고 번역을 해서 그 의미가 강도있게 전달이 잘 안되는데 본문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노예를 가리킨 말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로마인구 약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생산수단 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생산수단이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노예하고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사람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종은 평생동안 주인의 소유로 물건처럼 취급받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주인이 죽을 때 산채로 무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종의 운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의 지난날의 신분을 ‘죄의 종’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철저하게 사단의 지배를 받는 소망없는 인생임을 말합니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자유가 그립겠습니까?
빠삐용이란 영화를 보십시오. 스티브맥퀸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을 도망치려고 애를 쓰지않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라는 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한번 누리고 싶은 소중한 것입니다. 아마 탈출의 성공 가능성만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탈출을 시도해 볼 것입니다. 감옥 안에는 햇빛이 미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감옥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그리운게 자유입니다.
이처럼 죄로부터 속박당한 인생을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를 씻겨주고, 자유를 주신 이 사실앞에 바울은 ‘의의 종’이란 표현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젠 자신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의 소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진리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의 풍성함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바울처럼 자기를 종이다고 표현한 사람도 드뭅니다. 로마서 1:1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소망없는 인생에게 다가오셔서 한량없는 은혜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 사실앞에 바울이 강조하는게 무엇입니까? 이제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답게 은혜에서 거룩으로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무슨 말입니까? 지난날의 죄에 속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신분의 변화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①.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요 ②. 적극적으로 구별된 삶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를 들어 어느 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을 하다가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어렵게 돈을 구해와 가지고 그를 빼냈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그 가족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다시 노름에 손을 대어서 빚을 지고 또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면 누가 그를 동정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갈5:1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다시 죄에 빠져 어두움에 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라는 이 말은 죄와 싸워 승리하는 생활 속에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거룩성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①.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날마다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함께 왔던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눅22:40)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다니엘이 들어간 사자 굴과 같습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사람이나 환경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마귀가 들끓습니다. 눈을 떠보면, 세상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갔던, 극렬히 타는 풀무와 같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그 속에 떨어지면 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면,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벼랑 끝과 같은 곳에서 마치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떨어지면 조난당합니다. 사자 굴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그 속에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그는 알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심장부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매일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아찔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그는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살벌한 환경 속에서 죽지 않으려면, 기도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떨어지면 사자 굴에 빠집니다. 우는 사자들이 우리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무언가를 배우면 이길 수 있습니까? 더 많은 재주와 식견이 필요합니까? 스펙이 나를 도와줄 것 같습니까? 내가 자랑하려고 쌓아놓은 것을 사자가 한꺼번에 뜯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공으로 날아오르는 날개입니다. 상공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엔진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전술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건 기도입니다.
②.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은혜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의지하고 붙잡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갔습니다. 재판장은 폴리갑에게 예수를 욕하고 모른다고 하면 석방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원형경기장에 끌려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름이 부어진 장작더미위에 묶여 있습니다. 죽음이 몰려오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이 순간! 단 한번만 예수를 모른다고 하면 그는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내가 80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은 나를 한번도 섭섭하게 하신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내가 살아남겠다고 지금까지 나를 돌아보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수 없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장렬한 순교를 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두려움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은혜의 말씀이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붙잡는 인생은 죄의 지배를 당하지 않으며 거룩에로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행 20:32에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남은자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떠나면 앞으로 다가올 어두움의 세력들 앞에서 이겨낼 수 있는 멧세지를 증거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이 은혜의 말씀은 내 인생 내 삶을 든든히 세워줍니다. 그러므로 유혹으로부터 죄로부터 승리하게 합니다.
③. 예배에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요즘 저는 예배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 믿음의 성도들은 예배에 인생을 걸고 그날 들려준 말씀 앞에 삶의 현장에서 결단하고 살아가는 힘이 있었는데 오늘 내가 드리는 이 예배가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분, 내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현장이 예배의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을 리셋하는 자리입니다. ex) 핸드폰 앱을 여러개 깔아놓으면 충돌이 돼서 핸드폰이 기능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핸드폰을 껐다 다시 켜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나를 이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오게 하셨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진 생각, 내 삶의 패턴, 내 모든 것을 다 리셋하는 자립니다. 무엇으로 지웁니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 내삶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의 최고의 가치는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로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일어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의 결과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거룩으로의 의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불러서 선하냐 악하냐를 따지지 않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라”하고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가끔 우리가 넘어질 때도 있고 못된 것을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배반합니까? 우리의 지체를 주님을 위해 드려야지 마귀에게 허용할 수 있나요? 우리 생각을 주님께 드려야지 죄 짓는데 바칠 수 있습니까? “내가 손해를 보아도 좋다. 아무리 손해를 보아도 주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것을 내가 할 수 없어. 나는 주님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야. 나는 주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야” 이것을 깨닫고 죄에 대항하여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은혜의 말씀을 손에 쥔 사람입니다. 은혜는 강합니다. 은혜 충만한 사람은 죄가 절대로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거룩에로의 초대 앞에 내 인생을 아낌없이 그분을 닮는데 투자할 것입니다. 이제 이 은혜 이 사랑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고전6:19-20에 보시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이제는 과거에 불의와 불법에 드리던 지체를 돌이켜 의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저질렀던 그 열심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아보십시오. 건강을 위해 새벽마다 등산이다, 산책이다 하는 그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해 보십시오. 세상 모임에는 둘째가라하면 서러울 정도로 참석하는 정성만큼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남은 때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무엇보다 은혜에서 거룩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자세로 내 인생의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의의 종으로 드려지는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