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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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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옛 남편과 새 남편 (롬 7:1-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9-07-28 | 조회: 914
옛 남편과 새 남편  롬 7:1-6. 
 

서양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에게 하루에 한번이상 “I love you -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의 고백을 해야 한답니다. 삼일만 이 고백을 하지 않으면 이혼사유가 됩니다. 아무래도 우리네 문화는 이와는 다릅니다. 아마 멀쩡하던 남자가 매일같이 “여보, 사랑해요.”를 반복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혼사유가 될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아들, 딸 낳고 30년 이상을 살았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 나 사랑해?” 이건 왠지 어색하고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참 듣기 좋은 소리, 소중한 시간 꼭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하는 말입니다.우리 교인들이 제게 해 주는 말 가운데서도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바로 “목사님,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우리교회는 참 행복한 교회입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오늘도 예배하고 돌아가시면서 “참 행복하다”는 감격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부터 보는 7장에 그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진단은 “죄에 매여 살기 때문이요, 율법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옛 남편과 새 남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하는 로마서는 성경 중에서 제일 뜻이 깊고 가장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서가 씹기 힘든 갈비라면 이 7장은 갈비 중에서도 힘줄이 있는 가장 질긴 부분이다.’ 재미난 표현이 아닙니까? 로마서가 교리를 핵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좀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중에도 7장이 좀 더 어려운 본문입니다. 교리적인 부분의 설교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힘을 얻고, 은혜를 받는 설교도 필요하지만 교리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건물로 친다면 마치 콘크리트로 기초 공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높은 건물 짓는 것을 보면, 매번 콘크리트를 붓는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나중에 집을 멋있게 지어도 한 방에 날아갑니다.

 

이제부터 7장에서 다루는 율법에 관한 중요한 내용은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주셨습니까? 죄를 지적하고 죄를 점검하고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준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7장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절까지는 율법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임을 보여주는데 그 유명한 결혼비유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12절까지는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지도 못하고 율법으로 성화되지 못한다면 롬7:7에서 이야기하듯 “율법이 죄냐?”는 질문에 봉착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율법이 죄가 아니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하는 우리로 하여금 죄로인한 절망감을 갖게하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이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24절로 대표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는 표현이 신자가 하는 표현이냐, 불신자가 하는 표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아래 있으면 우리는 결코 성화에로의 삶으로 나갈수 없다는 것과 성화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이 일관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에 매일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본문 1-6절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바울도 이 부분이 어렵다고 여겼는지 좀 더 쉽게 설명해 내려고 결혼관계로 비유를 들어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이고, 율법과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이해해야 로마서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관계를 예로 듭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마치 까다롭고 무섭고 엄한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던 부인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보게 되면, 지금과는 달라서 남편은 여자를 마음대로 주관하던 시대였습니다. 남성위주적인, 가부장적인 문화 안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그 여자는 완전히 그 남자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그가 여자를 돌보든 안 돌보든 상관없습니다. 보문을 좀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각색을 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크리스챤”이라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살게 되는데 이 남편의 이름이 Mr. Law - 율법씨입니다. 처음엔 반듯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신사 - 율법씨가 좋아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를 지내고 나니 그는 함께 살만한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그는 일종의 완벽주의자로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도 용납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잘 해 보려고 노력해도 그의 요구엔 한계도 끝도 없었습니다. 이틀을 지나고 나니 그는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이 남편은 날마다 부인을 때리고 난폭하게 구는데 자기가 정한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하면 징계합니다. 아내가 늦잠을 자면 마구 두들겨 팹니다. 밥을 태우면 몽둥이가 날아오고 말을 조금만 듣지 않아도 방에 가두고 풀어주질 않습니다. 이런 남편과 살아가기가 쉽습니까? 도저히 살수 없지요. 그렇지만 도망치면 쫓아와서 잡아가니 안 살수도 없습니다. 결국이 부인은 남편의 억압에 도저히 끊고 나올수 없는 그런 굴레에 빠집니다. 잘 해 보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실수를 낳고 맙니다. 깊은 열등감에 사로 잡혔고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쉽게 이혼을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이혼을 청구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입니다.

 

마침내 아내 “크리스챤”은 만사에 자신감을 잃었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남편에게서 벗어나는 길이 한 가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남편이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던 어느 날 그 지독한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이 컸지만 한 달 두 달 지나는 사이 묘한 해방감 마져 들었습니다. 얼마 후 이 여인은 “전”씨 성을 가진 “도자”라는 친구 즉 “전도자”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 새남편의 이름이 Mr. Grace - 은혜씨입니다. 알고보니 이 은혜가 바로 “크리스챤” 여인의 첫사랑 “J”라는 그 청년이었습니다. 어릴 때 J - Jesus - 예수라 불렸는데 지금은 Mr. Grace - 은혜씨가 된 것입니다.이 새 남편 은혜씨는 크리스챤 여인을 사랑하며 이 여인의 모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허물이 허물로 보일리 없었고 약점이 약점으로 보일리 없었습니다. 그는 이해심과 동정심, 사랑과 긍휼과 이해로 늘 흘러넘쳤습니다. 크리스챤 여인은 삶의 활기와 자신감을 찾았고 잃었던 인생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점차 매력적인 여인으로, 사랑스런 아내로 바뀌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옛 남편과 새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첫사랑 찾은 여인의 행복’입니다.

 

왜 사도바울은 이런 비유를 썼습니까? 그리고 이 비유에서 가르치려는 핵심은 결국 무엇입니까? 전 남편의 사망이 첫 번째 결혼관계를 끝나게 하였고 그녀를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게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백성은 첫 남편인 율법과 결혼을 했습니다. 여기서 매정하고 엄격하고 두려운 남편은 율법을 비유하는 것인데, 율법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지적해서 깨닫게는 하지마는 우리에게 아무런 기쁨이나 소망을 줄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죄의 비참성을 지적하고 고발했으나 기쁨도 감격도 감사도 줄수 없었습니다. 마치 까다로운 남편과의 결혼생활처럼 고통스런 나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육신에 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던 것은 죄의 정욕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남편을 만난 이 여인은 놀라운 인생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바로 열매의 삶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서 예수님과 결혼하게 만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제 새 남편과 결혼했으면 그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 5절과 6절은 전혀 다른 열매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 5절이 율법씨와 살던 열망이었다면, 6절은 새로운 결혼생활의 열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여기 “육신” “죄의 정욕” “사망의 열매”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씨와 사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 “이제는”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원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이제”란 말은 우리는 이제부터 더 이상 비극적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은혜와 함께 사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새 인생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율법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죄의 정욕 때문에 사망의 열매만 맺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신랑을 만나 첫사랑 예수와 신방을 꾸미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열망이 생겼습니다. “죄의 정욕”이 아니라 “사랑의 욕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은혜의 신랑 예수를 만나고 보니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율법 안에서 저지른 죄의 삯을 지불하기 위해 내 대신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도 내가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전에는 ‘사망의 열매’를 맺던 우리가 이제는 ‘생명을 위한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전에 사탄을 위하여 열매를 맺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습니다. 전에 육신을 위한 열매를 맺던 우리가 이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극적인 삶의 대조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아직도 타락한 육신의 본성을 좇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을 좇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 맺혀지는 그 놀라운 열매, 그 풍성함의 열매를 아시는지요?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외칩니다. 갈5:16절에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안하겠다고 결심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그가 나를 감화하실 때 주님 기뻐하시는 일만 해 보세요. 그러나 아직도 육체를 따라 살면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이 19-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것들이 사망의 열매입니다. 처음에는 비슷하게 출발하고 인간은 모두 다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깊은 곳에서 그의 삶이 맺어가고 있는 열매는 사실 이런 냄새나는 사망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좇아갈 때는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요? 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살아있는 신앙이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걷노라면 내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달리 보일 수밖에 없고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자유 한 심정에서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예수님께 순종하고 삽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는,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슬픔이나 후회, 갈등이 없습니다. 오히려 승리의 선언, 환희가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깨닫고 나니, 두려움도 걱정도 다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삶을 그토록 능력의 삶이 되게 만든 열쇠였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기쁨을 누가 막겠습니까? 입을 틀어막는다고 막아질까요? 눈을 막는다고 막아질까요? 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 거룩한 열매를 삶속에 맺고 사는 이 사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화와 기쁨은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이 평화와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 수가성에 사는 여인을 보세요. 예수를 만나 그 순상 그는 더 이상 옛남편에게 끌려 다니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가면서까지 남의 이목을 피해 물을 길러 온 그 여인이 물동이를 내 팽겨치고 자기를 괄시하던 동네에서 복음을 외친 그 사건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습니까? 평생을 사람대접 못받던 배우지 못한 무식쟁이 베드로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고, 그의 말씀을 통해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말주변으로 그런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여러분,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볼품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도,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왜소하게 보일지라도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면 거기에 능력이 나타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봉사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봉사하고 우리 힘으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려 하면 힘만 들고 기쁨이 없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교회는 훈련의 기간으로 교회 학교 학생들이 8월에 밖에 나가 수련회를 합니다. 또 전 목장들이 수요 예배 때마다 선교의 열정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기에 모든 교우들이 기쁨을 가지고 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 식혜 나는 1부에 다 팔리기를 바랍니다. 여기엔 사람이 담겨 있습니다. 섬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성도 여러분! 옛 남편 곧 율법의 남편은 죽었습니다. 이제는 새 남편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에 감격해서 주를 위해서 기쁨과 감격으로 더욱 성결하게 살고 성령을 따라 주를 위해 내 인생을 헌신하는 모습이 여러분의 생애가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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