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나 롬7:7-12. 2019. 8/4. 주일 설교
섹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멕베드가 나옵니다.이 맥베드가 왕권을 찬탈하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는 부귀영화, 모든 호의호식 통치력을 가진 왕으로 모든 것을 다 누리는 절대 군주가 됩니다. 근데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누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가 한나라의 왕이었고, 권력을 찬탈했고,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살았던 왕이었지만, 어느 날부터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의사에게 찾아가서 내 병을 치료해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의사가 진단하기를 ‘폐하의 병은 제가 고칠 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왕께서 고치셔야 합니다.’ 그는 탄식하기를 ‘내가 절대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의 그 온갖 향수를 가지고도 내 손에 묻힌 이 피를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탄식을 하며 자기 내면에 있는 죄의식, 죄의 불안 때문에 벌벌 떨게 됩니다.
사람은 제 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양심적이라해도 선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일찌라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란 말씀처럼 이 죄의식, 죄책감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영혼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왕권을, 통치력을, 군사력을 그가 이 땅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졌더라도, 그 죄책감으로부터 그 죄의식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기 때문에 이 타락한 피가 흐르는 인간에게 있어서 그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목말라하고 허덕인다 해도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말라하고 허덕이게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율법과 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이어 7장을 함께 보지만, 참 어렵고 난해한 구절이 있기에 저 역시 지나치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도 있지만, 이 본문을 통과해야 8장에 어마어마한 로마서의 진수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석이라 한다면 로마서는 보석 중에 다이아몬드라고 부르고 롬 8장은 그 다이아몬드의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정말 눈부시고 영롱한 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8장의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우리를 완전히 밑바닥에 완전히 처절하게 낮추게 만드는 것이 오늘 본문에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율법의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탐심이 죄입니까? 법정에 가면 탐심은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도적질이나 음행의 범죄처럼 드러난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고 살인하여야 죄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보면 탐심이 큰 죄입니다. 출 20:17절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 계명을 보면 이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에 있는 탐심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율법은 우리의 죄 됨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왜 죄를 집니까?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한 그 열매를 따 먹은 것입니다. 탐심입니다. 그 결과는 에덴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아간이 전쟁터에 - 전리품을 챙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했는데탐욕의 눈이 어두워서 그것 몇 개를 훔쳤습니다.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합니다. 사울왕은 아각 왕과 불레셋의 그 전리품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탐욕의 눈이어두워서 몇 개를 숨겼다가 왕권이 박탈당합니다.가롯 유다는 탐욕의 눈이 어두워서 은 30개의 스승을 팝니다. 그도 탐욕의 눈이 멀어 비참한 최후를 보냅니다. 여러분, 탐심, 탐욕이 눈에 보이나요, 옆의 사람을 보면 멋있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인죄를 지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음행죄를 지거나 할 때, 또 거짓말을 할 때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탐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에스키모사람들이 늑대를 잡을 때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늑대사냥을 합니다. 그들은 늑대를 잡기 위해 짐승의 피를 마련합니다. 그 피를 밖에 내어놓아 날카로운 칼한자루를 그 속에 세워둡니다. 얼마간 지나게 되면 피가 얼어버리게 되는데 그 얼어붙은 핏덩이를 늑대들이 잘 다니는 길에 놓아두면 늑대들이 지나가다가 피 냄새를 맡고 와서 혀로 핥기 시작합니다. 한참 핥다보면 차가운 얼음에 혀의 감각이 마비된 줄도 모르고 핥습니다.
그런데 핥으면 핥을수록 점점 더 맛있는 피가 나옵니다. 이제는 차가운 피가 아니라 따뜻한 피가 나옵니다. 그게 자기 혀에서 나는 피인줄 모릅니다. 얼음 속에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칼에 자기의 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빨아먹습니다.이것이 탐욕의 실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탐심 때문에 우상숭배하게 되고 탐심 때문에 이웃을 해하게 되고 부모를 무시하게 되고 탐심이 죄가 되는 것을 바울이 깨닫습니다 . 탐심이 죄였고, 이 탐심이 크다보니까 엄청난 죄를 유발 시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하여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을 합니다.
Ⅱ. 율법은 죄를 불러일으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여기 8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란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말씀으로 번역된 말의 근본적인 뜻은 “한곳을 출발점으로 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출발점으로 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죄가 계명을 지렛대의 받침으로 하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율법에 의해 정체가 노출된다해도 오히려 율법을 작전의 기지로 삼고, 지렛대받침으로 기회를 타서 더 큰 죄를 범하도록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죄가 팽창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보화시대에서 좋은 일들의 정보가 빨리 전파되는 것 보다 죄의 정보가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가정의 꽃이 되고 민족의 장래를 걸머질 우리의 자녀들의 탈선은 이미 위험수위가 넘어선 상태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청소년의 범죄의 확산은 이제 막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좀 오래 된 일입니다만, 청소년들이 찍은 저질 비디오테이프가 시중에 유통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빨간 마후라’라는 제목의 성인물이었습니다. 방송매체들은 저마다 소리를 높여가며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심각한 타락문화를 고발했고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여러 대안들을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오히려 청계천 일대의 불법 비디오 판매고만 높아졌습니다.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이 사건을 공개한 것은 청소년들의 타락문화를 고발하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건만 결과는 관심 없던 학생들 심지어 어른들까지도 이 불법 비디오구입을 부채질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문제입니까? 신문, 방송사들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방송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이라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자 이 자료를 보도했으니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보도를 본 사람들 안에 움츠리고 있던 죄가 기회를 타서 죄를 짓도록 유혹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 다음으로 엄청나다는 것을 아십시오. 죄는 모든 학설, 모든 이론,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까지 지렛대의 받침으로 작전의 출발점으로 기회를 타서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Ⅲ. 어찌 이 뿐이겠습니까? 9-11절을 보시면 율법이 주는 고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할 때는 누구든 적당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간음죄를 저지르지만‘그래도 옆에 있는 저 친구보다는 내가 깨끗하지’라는 생각으로 위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할 때는 내게 주어진 힘을 가지고도 적당히 사기 치고 협박을 해서 검은 돈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보십시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됩니다. 양심에 호소하는 법이 나를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식한다고 해서 쉽게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죄는 과거처럼 적당히 넘어가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공격해 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왕 버린 몸, 하고 싶은 대로하자’는 식으로 막가는 인생길을 걷게도 합니다.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 때문에 바울도 얼마나 갈등하고 있는지를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와 같은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독교역사상 가장 주님을 사랑했고, 그 말씀을 신뢰했던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느끼는 좌절감이 있습니다.‘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행할 능력이 없구나! 어쩌면 이렇게 나는 좌절된 인간이냐? 어쩌면 이렇게 거꾸로 된 인간이냐?’고 고민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죄인중의 괴수다’라고 까지 말합니다.사람들은 나에게 존경과 칭찬과 신앙이 좋다는 말을 하지만 나는 나만이 아는 절망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 무력감, 육체로서는 도무지 주의 계명을 따를 수 없는 좌절감, 그리고 애쓰면 애쓸수록 고통이 더해지는 이 아픔이 바로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10절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말씀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의 죄의 더미를 보기 때문에 그 계명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비유가 바로 눅18장에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또 한 사람은 백성들에게 매국노라고 지탄 받는 세리입니다.
여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을 보게 됩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릅니다.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나는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받칩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열리지 않고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 내가 매우 괜찮아 보이고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드러나고 죄는 죽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성전에 올라간 세리를 보십시오. 그는 율법 앞에 자기가 얼마나 탐심의 노예가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그 죄의 모습 앞에 절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은 율법 앞에 눈이 열린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3:24절 말씀에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죄책감, 죄의식으로부터 몸부림치는 우리 인생의 비참함 속에서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초등교사와 같습니다. 개역 한글에 보면 몽학선생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이 몽학선생이란 의미는 옛날 학교 등교 길에 어린 아이들이 가는 등하교 길을 안내해주는 그 선생을 몽학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길을 갈 때 안내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이 그 표지판을 보았다고 목적지에 도착을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을 할 때까지 길을 계속 바르게 안내해주는 역할이 바로 표지판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의 기능은 바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거기엔 자유가 있고, 죄 사함의 은총과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죄로 인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혼자 떠맡으셨으니 그에게 무엇이 뒤따르게 될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주님에게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심으로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놀라운 뉴스는 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희생을 당해야 합니까? 나 같은 죄인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벧전2:24절에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와의 관계가 이제는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죄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주홍빛 같은 큰 죄라도 십자가의 보혈에 깨끗이 씻기움을 받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와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한 몸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모든 죄 용서받은 놀라운 기쁨이 찾아옵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찬송가 가사대로 우리의 모든 흉악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다 떠안으시고 내 인생의 가장 복된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이제는 죽음도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제는 율법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마귀도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율법 아래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 안에 살아갑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는 두 종류입니다. 율법 아래 있느냐?아니면 은혜 가운데 있느냐 딱 두 가지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삶은 내가 끌고 가는 삶입니다. 내가 무언가 노력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애쓰면 지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덮으시면 그 은혜가 나를 순종하게 합니다.신앙생활은 인간적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의 강권하신 사랑의 힘으로 옮겨가게 될 때 쉽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잠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십시오. 승리는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 그 은혜에 푹 잠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얽매여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순종이 아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할 것인가에 대해 흥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남은 생애를 이 시험에 져서 실패자로 살지 마십시오. 헛된 일을 악순환 속에 보내지 마십시오. 성도 된 참다운 승리와 보람과 자랑을 누리고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자녀들에게 어떻게 복 주시는가 지켜보십시오. 성경이 약속한 대로 감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며내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찬송이 내 인생을 새롭게 펼쳐 나갈 것이며 주의 그 놀랍고 풍요로운 평강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날마다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