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앙인의 자유 롬 8:1-4. 2019. 8/25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사이에 두꺼비 한 마리가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주인이 와서 난초를 아주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가꾸는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두꺼비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좇아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꾸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키워주고 사랑해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너(그것은) 잘 몰라서 한 소리야. 나는 발이 없으니 목이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하고 소가 와서 나를 뜯어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지 않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는 도망도 가지 않니!’ 그 말을 들은 두꺼비는 비로소 난초가 갖고 있지 않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도 예수를 믿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자유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종이 된 것처럼 멍에를 매고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은 심령에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무엇엔가 눌려 사는 것 같은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죄책감일까요? 아니면 예견되는 어떤 불안감일까요? 아니면 이유 없이 쫓아오는 공포일까요? 아니면 누구로부터 들을 이상한 말 한마디에 내가 끌려 다니는 것일까요? 가만히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누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소유하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짓눌려 있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없습니다.이것이 한 자유를 잃은 자의 아픔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은 얼마나 귀한 복음인지 모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억누르며 과거로 이끌고 가던 그 모든 것의 줄을 딱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는 무죄다. 너는 깨끗하다. 너는 이제 해방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로마서 7장 후반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싸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봤습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선은 있는데 그 선한 삶이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원치 않는 악이 나를 주장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싸움에 지쳐서 넘어집니다. ‘나는 아무래도 희망이 없는 사람인 모양이야. 이 싸움은 승산이 없어, 나는 승리할 수가 없다’는 절망감과 패배감, 혹은 정죄 의식과 패배의식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면 우리도 영적인 자포자기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비극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로마서의 대주제입니다. 8장 1절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안겨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들려주는 대 주제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이처럼 아름답고 복된 복음의 메시지가 또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우리를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의인으로 여겨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입니다.
오늘 함께 대한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런 정죄 의식이나 패배의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주님은 우리를 여기에서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정죄’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바꾼다면 가장 근사한 단어가 ‘저주 속에 버림을 받는다’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저주받을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에 왕으로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죄가 뿌리는 악령의 권세에 우리가 놀아나지 아니하며, 죄가 사용하는 율법의 무기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공포를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요8:36에 주님이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2)
아들이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선포하신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이 영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주인이었을 때 우리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똑똑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인간은 홀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에게 속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속해야 됩니다. 어느 쪽이든지 소속이 되어야지 독립된 자유인으로서 인간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워지기에는 너무도 사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누린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짓눌려 있어요. 영적으로 해방이 안 되고 있어요. 한국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오늘 우리 교회도 이런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옛날에 무속신앙에 젖어 있었던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어 그런지는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도 쫓기듯 늘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채 무엇엔가 끌려 다니고 억눌리고 어떤 면에서는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심기를 이용하여 한동안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이 시중에 나돈 적이 있습니다. 집안에 저주가 흐르니까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살면서 도무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까닭도 모르게 당하는 고통이 있느냐 이것은 바로 저주 때문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느냐 거기엔 저주가 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렇습 니다. 예수를 믿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조상의 죄로 인해서 저주가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잘 믿는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아들이 또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엔 손자까지 심장이 약해서 애를 먹느냐? 그것은 그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의 대물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감정은 그 가정에 이해할 수 없는 우환이 끊치지 않고 덮치느냐? 그 가정에는 분명히 무슨 저주가 지금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악한 영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저주를 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불행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밖에 이상한 잡초들이 무성하여 농사를 망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그 땅에서 한때 몰살당한 원혼들이 서려 있어서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금식기도를 해라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하고 매달려서 그 저주를 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능력 있는 목사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느껴지세요. 마치 굿을 해야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쟁이 소리를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말에 약해요. 여러분! 이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슨 소리를 갖다 붙여도 근본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이 정도의 저질 종교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이 고작해야 집안에 대물림한다는 집안에 저주하나 쫓아내지 못하는 그런 정도의 자유입니까?
조상이 무슨 죄를 범했던 간에 과거에 내가 어떤 죄를 범하고 살았던 간에 일단 예수 믿고 십자가를 붙들면 그 모든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능력을 가진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할렐루야!! 우리가 잘 외우고 사랑하는 성경구절이 있어요. 고후5:17에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다 지나갔어요. 조상 때 모든 것도 다 지나갔어요. 내가 과거 예수 모르고 행하던 것 다 지나갔어요. 그 모든 것 다 십자가에 못 박아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바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예요. 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것 안에 무슨 저주가 있어요. 만약에 새것이 되었도다하는 그 말씀 안에 아직도 저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 예수를 왜 믿어야 합니까? 오늘 이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이 자유, 저주로부터의 해방 이 복음을 잘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남이 모르게 슬슬 점쟁이에게도 가보고, 또 이런저런 소리하는데 가서 자꾸 귀를 기울이고 했던 전과자 경력이 있는 사람, 예배 끝난 후 가지 마시고 무릎 끓고 회개하고 나가세요. 그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모든 죄를 대신 해주신 예수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자! 따라합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저주가 없어요. 버림이 없어요. 자!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에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행들이 닥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그런 질문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될 사실은 우리가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어도 주님께서 아주 높은 성벽을 우리주변에 싸놓으시고 세상에 어떤 악한 영향이 들어오지 않는 피난처에다 우리를 두고 살게 한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안 믿는 사람과 섞여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죄악의 소굴이고 악령이 활동하는 무대입니다.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이고 부패한 육신의 인간들이 거쳐하는 곳입니다. 이곳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세상에 살면 이런일 저런일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담대하라 너 믿음 좋다고 해서 안 당하는 것 아니다.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은 주목해 듣지 않고 무조건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지켜 주셔서, 남이 다 병이 들어도 우리 가정만은 건강하고, 남이 다 실패해도 나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구한 것을 얻지 못해도 나만큼은 백배로 주신다는 약간의 미신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만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벌벌벌벌 떨고 어찌 할 줄을 몰라요. 여러분! 진정한 신앙생활은 이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몇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얼마전 터어키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처자를 끌고 무슬람이 판을 치는 터어키까지 가서 복음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암에 걸려 죽은 선교사분이 계십니다. 부인이 생계의 대책이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하니까 안구에 암이 생겼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이 헌신된 가정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세요.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속에는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불행 속에는 더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역사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 닥치는 어떤 불행도 우리는 축복을 위한 씨앗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자유인이요 우리는 정죄함을 받는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절에 정죄함을 받지 않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동안 우리를 지배하던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법 위에 다른 법이 생긴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위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게 되어, 율법보다 더 큰 은혜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생명의 성령’이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 성령님은 생명의 성령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풀어놓아 자유하게 해줍니다. 3-4절에 말씀하여 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당부하는 게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의 삶의 기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살지만, 세상과 다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능력이 생깁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요14:16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돕는 자’, ‘대언자’, ‘상담자’, ‘안내자’란 의미입니다. 우리 곁에 항상 함께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여 도우시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에게 한없이 실망하며 살아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내 모습을 보더라도 도무지 실망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도 예수 믿고 깊은 갈등과 번민, 탄식에 빠져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실패의식을 벗어 던지지 못하여 신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거야. 나만이 알고 있는 무서운 죄악을 안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얼굴조차 들 수 없어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십시오. 그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미 무죄는 선언이 되었습니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복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미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살아가는 여러분을 누가 정죄 하겠습니까?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정죄함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중 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 중 하나님 앞에서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고 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