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함께 하는 삶 롬 8:12-17
김동인 작가가 쓴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은 이 책이 나올 때 엄청난 반응을 일으킨 책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 아이가 내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갈 때,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어느 구석을 봐도 닮은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니 발가락은 닮은 것 같거든요, 요즘에 이런 일들이 부쩍 많아져서 친자확인 의뢰도 많고, 그런 일을 하는 기관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의뢰한 사람들 가운데 30%는 실제로 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내 아이가 아니라는 의심이 간다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친자확인을 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어릴 때는 누구를 닮았는지 잘 모르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반드시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다못해 발가락이라도 닮습니다. 친자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영을 모시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다면 새로운 DNA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을 닮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영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려면 내 삶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변화의 속도는 다르지만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변화란 세상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는 주제이고 로마서 전체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분에 걸맞은 성화,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화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살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8장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Ⅰ. 성령님의 인도 앞에 내 자신을 맡겨야합니다. 14절에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 ‘인도함을 받는다’ 는 말은 강제로 끌고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대로 살던 시절에 잘 가던 곳을 못 가게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꼭 가야 할 곳은 가기 싫어도 데리고 가실 만큼 강력하게 우리의 행동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끄는 힘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리 도망가려고 발버둥쳐도 도망칠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핸들을 육신에게 맡겨 놓지 않습니다. 할 성령의 손에 맡겨 놓고 삽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까?
요 16:13을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둔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리니” 진리가 인도하신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은 반드시 평탄한 길만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위험이 도사리는, 도처에 지뢰가 깔려 있는 인생의 길입니다. 시23편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우리 인생길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닥쳐오는 뜻하지 않는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 아침에 멀쩡하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덮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계곡, 죽음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목동들은 양을 치기 위해 두 개의 막대기를 가지고 다닙니다. 하나는 지팡이고 또 하나는 막대기입니다. 지팡이는 사람의 키 정도로 조금 길고 끝이 구부러져 있습니다. 목자들 그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양이 길을 가다가 옆으로 탈선할 가능성이 있으면 양의 목이나 다리에 이것을 걸어서 제 길로 올려서 놓습니다. 또는 때때로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톡톡 쳐서 제 길로 갈 수 있도록 경고를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막대기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맹수의 침입을 대비합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맹수의 침입을 감지하면 목자는 이 막대기로 때립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항상 막대기를 하나님이 주심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인생길에 다가오셔서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의 목자 되신 진리의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 주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인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푸른 초장의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어 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Ⅱ.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책임감이 동시에 수반됩니다. 15-17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여러분, 양자란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다지 피부에 와 닿는 단어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꼭 ‘내 자식’ 이라야 했고, 그래서 슬하에 자식이 없다든지 해서 다른 집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으라고 해도 “안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내가 왜?....”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 어떤 경우에는 로마 사람들은 양자를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식을 낳을 때 생각지도 않고 그냥 낳을 때가 있지만, 양자를 삼을 때는 생각을 많이 하고 그를 자기 양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낳은 자녀와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대에 악명 높았던 네로 황제도 사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입니다. 전에는 노예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황제의 양자가 됐기 때문에 당당하게 그 뒤를 이어서 황제가 됩니다. 왕가에서도 이러한데 하물며 일반가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단 가정에서 양자를 삼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가정교사를 붙여줍니다. 아 아이 교육이 다 끝나게 될 무렵 그 가정 교사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 그대를 위해서 그대의 양부모가 된 분들은 놀라운 상속을 준비해 놓았다”고 격려해줍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아바→아빠(아람어), 아버지→헬라어 아람에서는 아버지를 존중한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말의 아빠란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두려워해서 여호와를→아도나이 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부르진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면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하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간섭 하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놀라운 특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빠가 되십니다. 믿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성령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써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에게 17절에 보시면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재산을 준비하셨고 너는 그 재산을 상속자라고 말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상속자’란 말은 너희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넘어지는 순간도 있고 쓰러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실패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당당하게 너를 위해 준비하신 이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그 영원한 곳의 상속자가 되어야 해”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빛나는 상속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때로 이 땅에서 내가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를 지치게 하고 쓰러지게 만드는 아픔의 상처가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넘어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 신분에 따른 보장이 있고, 새로운 삶이 가능케 하시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며 함께 계시며 하시는데 왜 실망하십니까? 왜 넘어지십니까? ‘육신에게 지기’ 때문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슨 말입니까? 성령을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육신대로 살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육신에게 진다‘라는 표현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 있는 죄의 모습들, 타락성에 빠져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라도 죄에 대한 즐거움, 그 단맛 때문에 그 유혹을 못 이기고 죄에 빠집니다. 후회하면서도 그 단맛에 빠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는 비결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죄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맛보면 이전 것은 잊어버립니다. 그 죄가 주는 즐거움을 이길 수 있는 즐거움은 더 높은 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진짜 믿는 사람은 매일 교회에 나와도 질리지 않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는 괜히 교회에 와보고 싶고, 하루 종일 찬송을 부르고 싶습니다. 어느 순간 보니 주만 보이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런 것을 ‘하나님께 중독’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은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의 싸움을 일평생 해야 합니다. 전에는 홀로 싸우며 결심도 하고 작정도 해봤지만 죄의 세력이 너무나 커서 안 되었습니다. 육신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그냥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죄의 권세를 이기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황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은혜 앞에 선 사람이 바로 성령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무엇보다 이 은혜 앞에 살아가면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80년대 초반에는 지금처럼 해외로 선교사들이 많이 나갔던 시절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시절에 해외에 나가서 선교사 사명을 감당하다 세상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1984년, 파키스탄에서 40세의 한 젊은 한국인 선교사님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순교의 소식은 당시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정성균 선교사님은 전남 고흥 ‘거금도’라는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주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정식 중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여수의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경 야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한 믿음을 옆에서 지켜보던 교인들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결국 목사가 되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주변 여러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을 통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기에, 그는 늘 사랑에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고, 빚진 마음으로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에 이어 파키스탄에서 선교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신학교를 세우고 14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열성적으로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헌신의 결과는 그에게 건강의 악화를 가져왔고, 결국 B형 간염으로 인해 40세의 젊은 나이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가난 때문에 무던히도 고생을 했고, 장성해서는 부귀영화 한 번 누려보지 못하고 사랑에 빚진 자로 살다가 40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땅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정성균 선교사님에게서만 보여 지는 삶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생명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국땅에 가서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며 고생을 자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부귀영화 누리고픈 욕망을 스스로 거부하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왜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그런 고생을 자처하며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모두 파키스탄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의 길을 간 정성균 선교사님과 같이 스스로를 ‘사랑에 빚진 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빚진 자의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안락한 길을 내려놓고 고생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기쁘게 그 길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가 빚을 졌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평생을 갚아도 값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우리는 하나님께 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그 생명의 빚을 너무 자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우리가 생명 얻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의당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잊기 때문에 사랑과 생명의 빚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며 삽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꾸어 얻은 귀한 생명인데, 우리는 그 귀중함을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 앞에 살게 되면
Ⅲ. 성령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고난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17하반 절)
이 본문은 이제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누리는 특권이 얼마나 크냐, 그러기에 너희에게 주어진 상황 앞에 복음 이 기쁜 소식을 위하여 주님이 사명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따르는 필연적을 따라 오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려할 때에는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산다면 당연히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해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그 고난을 겪어내는 과정이 불 시험처럼 너무나도 힘들고 고달플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고난을 견디어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담보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물을 버린 것처럼 내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고난이 우리에게 없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이 없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연단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연단되지 못한다는 것은 작은 유혹의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고, 세상의 작은 이익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포기하는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나약한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그래서 아무리 세상이 그 어떤 것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해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때론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 버거운 것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자입니다. 이 빚을 갚고 사십시오. 이 주간 추석때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이 없으면 기도하십시다. 내가 변화 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데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펼쳐 질 것을 기대 하십니까? 안목사도 달라져야 하고 여기 모인 모두가 예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