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서 영광으로 롬 8:18-25. 2019. 9/15.
세계의 어느 나라든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할 때 예물을 교환합니다. 서구라파 풍습가운데 시집가는 딸에게 엄마가 진주를 건네는 습관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진주를 가리켜서 얼어붙은 눈물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에는?두 가지? 중요한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눈물에 대한 교훈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은 가치가 있는 것임을 교훈해 주려는 엄마의 의도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진주가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쉽게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진주는 바다의 보석이 아니겠습니까?
이 진주는 본래 아비큘레대라고 불리워지는 조개류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어쩌다가 모래 하나가 조개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까끌까끌한 모래가 보드라운 조갯살 속에 박히게 됩니다. 그러면 조개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몸에 박힌 모래를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개는 자신의 몸에 박힌 모래알 때문에 병들어 살이 썩기 시작하고, 얼마 가지 않아서 그 모래알 때문에 조개는 죽고 맙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조개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모래알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주층(nacre)이라는 생명의 즙을 짜내 자기 몸속에 들어온 모래알을 계속해서 덮어 싸고 또 덮어 쌉니다.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감내하면서 생명의 즙으로 모래알을 감싸고 감싸다 보면 그것이 영롱한 진주가 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 앞에 큰 시련이 닥치길 원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바람과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시련과 고통의 순간에 부딪치며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진주조개의 이야기에서 교훈해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닥친 시련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크고 값진 진주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통 속에서 흘리는 눈물의 양만큼 우리의 인격과 신앙은 더욱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Ⅰ. 우리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고백합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 ‘고난’ 그리고 ‘영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가 당하는 현재 고난이 얼마나 큽니까? 바울은 예수를 만난 이후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고난의 길입니다. 복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을 위해 자신의 세상의 모든 가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것만이 인생의 참 소망임을 피를 토하듯 외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무엇이 따라옵니까?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교지를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고난이 그를 괴롭혔겠습니까?
보십시오. 고후 1:8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 엄청난 고난의 현장가운데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살아날 희망이 없는 이 절망감! 보통 사람 같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난을 값지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 우리에게 매력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때때로 삶의 역경과 고난의 비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치기 시작할 때, 기도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 삶에 불어닥친 고난의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리듬을 잃어버리고, 균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서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자기를 둘러싼 그 어려운 상황 앞에 휩쌓입니다. 집안이 기울어질 때,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 내 앞길이 매우 불투명 하고 불안해 보일 때, 그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무력하리만큼 낙심하는 자리입니까?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쏟아지십니까? 아니면 그 어떤 대안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고통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C. S. Lewis 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고 나올 때, 한 학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증거 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째서 이런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그 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고통이 있어도 교만한 인생인데, 만약 인생의 길에 고통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 사람들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온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말썽 부리지 않고 잘 커갈 때, 남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잘 할 때, 손대는 일마다 잘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폭풍이 불고, 풍랑이 밀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C. S. Lewis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시119: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은 우리를 세우기 위한 또 하나의 성숙의 과정입니다.
Ⅱ. 여기 23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이 장차 영광으로 변화될 것을 믿지만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이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보십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여기 ‘탄식’은 불신자의 탄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하는 탄식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탄식’의 의미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서 한 여인이 내지르는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게 된다고 합시다. 그곳이 암병동이냐 아니면 산부인과 병종이냐에 따라서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통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은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어떤 고통은 죽음으로 이끕니다. 산모가 겪는 산통은 매우 심각한 아픔이긴 하지만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고통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쁨 기대 속에서 마지막에는 신생아가 태어남으로 그 고통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통은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탄식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나중에는 근무평가에 직원들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이유 때문에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투기성 재회에 덤벼들기만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부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나 체념의 탄식이 아니요, 진리를 가슴 안에 끌어안고, 장차 내가 누릴 소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코 세상방법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Ⅲ.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탄식을 피조물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니”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자연만물은 창조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만물까지 인간과 똑같은 저주의 자리에다 던져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피조물은 허무한테 굴복하게 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허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21절에는 ‘썩어짐이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이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게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왜냐하면 이 세상이 파괴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5년, 코스타리카 연안에서 코피와 눈물을 흘리는 거북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별 문제의식 없이 플라스틱 빨대와 컵을 수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버려진 쓰레기가 수많은 피조물을 탄식하며 죽어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플라스틱 빨대 하나를 분해하는 데 5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1997년, 미국의 해양 환경운동가인 찰스 무어는 일본과 하와이 사이에 있는 태평양을 떠다니는 두 개의 쓰레기 섬을 발견하였습니다. 원형 해류 순환과 바람으로 쓰레기가 한 � 汰막� 모여 이루어진 이 쓰레기 섬은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인공물 중 가장 큰 것들로, 대한민국 면적의 약 15배 정도의 크기이고 무게는 8만 톤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거대한 쓰레기 더미 때문에 수많은 해양 생물들이 먹이로 잘못 알고 먹었다가 죽게 되거나 피해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 섬 주변 지역에서 잡힌 어류를 조사한 결과 35%의 물고기 뱃속에 미세 플라스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모든 오염과 파괴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많은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에 다라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엄청납니다.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폐수를 흘려보내고 공해를 일으켜 가면서도 공장을 가동합니다. 왜냐하면 공해도 공해지만 당장 내 이익이 생기니까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주장하게 되면 누구도 잘못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욕심대로 살면 이 세상은 파괴되어가고 불균형과 갈등으로 파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피조물이 다 압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이 파괴되어가고 갈등이 생기고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단 하나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을 포기하고 제 마음으로 대로 제욕심대로 살기 때문에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Ⅳ. 고난에서 영광으로 이르기 위해 이 무질서하고 혼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위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주시고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마치 하루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현실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장 비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은 성취하기도 어렵고 성취해도 나중에 헛된 것임을 알게 될 때 더욱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의 희망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25절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그냥 손 놓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게 맡기신 그 일, 내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그 일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농부를 보시시오. 씨 뿌리고 결실을 위해 참고 열매의 때를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가격은 다른 것입니다. 그의 재산이 얼마냐? 지식이 얼마냐? 월급이 얼마냐? 하는 것은 가격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을 받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따라 평가됩니다. 때문에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쓸모 있는 사람, 꼭 필요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사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고난이라는 껍질에 쌓여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고난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걸 알기에 고난의 껍질을 벗겨내는 힘들 과정 중에서도 우리는 기쁨의 소망을 가지고 참고 견디어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현실의 고통은 잠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는 영원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어떠한 자세로 맞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절 말씀과 같이,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을 참으며 장래의 영광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요한 칼빈은 오늘 본문 롬8:18 말씀을 계속해서 암송하며 그의 임종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5번을 암송하고 16번째 암송하면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장차 나타날 영광이 있습니다. 피조물도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 익은 열매,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에 어떤 영이 역사하고 있습니까? 두려워하는 종살이의 영은 아닙니까? 육신의 생각에 파묻혀서 돈 걱정하며 사느라 누구를 한번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고, 고난을 두려워하느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지 못했고,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고 살지는 않습니까? 이제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의 날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하면 반드시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담대함을 주십니다. 베풀며 살게 하십니다. 고난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하십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위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