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승리는 다른 승리입니다. 롬 8:26-30. 2019. 9/22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비록 5구절 밖에 안 되지만,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위로가 됩니다. 아무리 가슴이 답답하더라도 이 구절만 암송하면 또다시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지금은 망해가는 것 같고, 지금은 실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결코 그렇게 끝나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승리는 한순간에 요행을 바라는 복권과 같은 남의 피눈물 위에 월계관을 쓰는 것 같은 그런 썩어빠진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을 닮아가는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가 이처럼 보배롭고 아름다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3가지 이유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Ⅰ.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여기 ‘이와 같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피조물인 자연계와 우리 성도들이 탄식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허무함에 굴복한 자연계가 탄식하고, 죄를 지은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성령이 어떻게 탄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도 우리의 아파하시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삶의 역경과 고난의 비바람이 갑자기 어느 한순간 휘몰아치기 시작할 때 기도 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해 보신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 삶에 불어 닥친 고난의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리듬을 잃어버리고 낙심하며, 좌절하며 방황하다가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 할 때가 있습니다. 강한 것 같으나 사실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때 유럽을 열광케 했던 나폴레옹은 초인적인 일화를 많이 남긴 위대한 군인입니다. 용장이요 지장이었던 이 나폴레옹도 집에 돌아오면 고독감과 외로움을 이길 수 없어 부인 조세핀의 무릎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한 시대를 움직이는 영웅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의지할 곳을 찾는 매우 약한 존재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생을 질그릇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질그릇이 얼마나 깨어지기 쉽습니까? 사실 인간의 육체는 질그릇과 같아서 조금만 과로해도 쓰러지고, 몸안에 조그마한 세균이 들어와도 감당치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를,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곁에 다가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 연약을 느낍니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면서 이 비장한 사건, 중요한 사건 앞에서 제자들에게 기도하자고 부탁하고 요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이 육체의 피곤함으로 이내 잠들어 버리고 만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단 한 시간도 깨어서 나와 함께 더불어 같이 기도할 수가 없었더냐” 그러나 이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잠들었다고 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 이해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막14:38)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의 중심은 안다. 기도의 목마름, 그리고 기도하고 싶은 욕구, 그 마음이 너희들 속에 있는 것은 내가 안다. 그러나 너희들의 육체가 약하구나’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시험과 도전을 받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더란 말입니까? 그만하면 반듯한데 돈 앞에 가면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시험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는 아주 의로운데 이성 앞에 가면 꽈당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 앞에서는 깨끗한데 명예 앞에는 꼼짝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듯 보이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싶어서 쳐다보면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충성하는가 싶은데 물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노랭이입니다. 그만하면 풍성히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 싶은데 언어생활에 날마다 실패합니다. 삶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답답함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에 서보기도 합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려고 엎드렸지만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의 초점을 상실하고,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좋을지조차 모르는 상황, 여러분은 이 기도의 방황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지금 이 상황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도 줄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 연약함에 빠져본 적이 있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의 연약성을 통하여 오히려 더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연약성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낙담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연약성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십니까? 연약한 사람을 전부다 영웅으로 만들어 주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 아닙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천사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우시는 성령님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 도운다는 단어를 성경 본문에 퍽 재미있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그 도우심의 사건이 얼마나 신비한지 그 당시에 사용되어지는 단어들을 가지고는 표현이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의 세 단어를 한 단어로 묶어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도우심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쑨안티람바노마이. ‘쑨 - 함께 내 곁에 계셔서 다정하게, 안티 - 반대편에서 건너편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곳에서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람바노마이 - 번쩍 들어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다정하게 계시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쩔쩔매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성령님이 옮겨 주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실패한 자리에서 안타까와하며 당황해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날마다 반복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함으로 실패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 "도운다"라는 단어의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우시나니" - 도왔다가 아닙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날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도와 주실 것이다. 미래의 약속이 아닙니다. 미래형이 아닙니다. 도우시나니 현재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과거에 여러분을 도와주셨습니다. 미래에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성령님은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언제나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매순간 순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승리의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지 못할 때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부족한 나를! 위해 끝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내 인생을 다루어 가십니다.
Ⅱ. 또한 우리의 승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이라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 속에는 필연이 있고, 그 필연 속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절대로 의미없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섭리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을 말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금방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고 해답을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인생을 큰 그림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이 큰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 당대에서 보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고 선한 뜻과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요셉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던 그였지만, 그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는 종의 신세가 되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보디발장군의 집에서 종이었지만, 그의 성실성과 진실성 때문에 주인의 인정을 받은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이 유혹을 뿌리친 대가로 그는 또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는 절망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한가지씩만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그와 같이 어려운 길로 인도하실 수가 있을까? 하고 의아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되어 진 일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잡고 계셔서 그 모든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는 동안 애굽 왕 바로의 두 신하를 만났습니다. 저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나중에는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감옥 속에서 3년동안 바로의 두 신하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냥 보냈겠습니까? 거대한 애굽의 정치를 수강료도 불지않고 최고의 강사 밑에서 배우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전액 장학금을 받고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료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감옥에 들어가서 바로의 신하들을 만날수가 있었겠습니까? 또 요셉의 형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애굽으로 갈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요셉의 삶 전체를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신 것을 볼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가장 좋은길로, 가장 최선의 것으로 내 인생을 붙들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왜 내게 다가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지 잘 알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내가 있어야 할 것과 또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인생에 잠깐의 고난을 허용하심으로 나를 더욱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는 이 사실을 믿고 나간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장 아름다운 승리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Ⅲ. 여러분 우리가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인생을 완성시켜 주시는 것 때문입니다. 여기 29-30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을 체험하고 영화의 단계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영광의 작업장에서 작업 중인 작품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로움의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인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슬픔의 파도 속에서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을 배우게도 하시고, 때로는 불화의 딜레마 속에서 화평의 진리를 배우게 하시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오래 참는 인격을 연단하게 하시고, 때로는 억지로 손해 보는 경험을 통해 관용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온 결과물로서 업적이 아닌 우리가 빚어 온 인격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 인격으로 빚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폭풍우, 삶의 역경 속에서 때로 우리가 고통하고 울고 탄식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허용하셨습니까? 찰스 코우만 여사의 글 중에서 재미있는 체험담을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기어 나오는 구멍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부터 큰 몸집이 빠져 나오려고 오랫동안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서 급히 가위를 가져와 그 구멍을 옆으로 조금 따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방이 고맙다는 듯이 퉁퉁불은 몸집을 기우뚱거리면서 쉽게 꼬치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큰 선심이나 쓴 것 같은 만족감에 젖어 이제 그 나방이 오색 찬란한 날개를 펴고 찬공을 날 순간을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가서 자기가 나비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날개를 질질 끌고 방구석을 기어다니는 달싹둥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 이것은 나방이 꽃을 찾아 이산 저 산으로 날아다닐 행복한 나비로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었습니다. 30절이 무슨 단어로 끝납니까?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감의 완성, 그것이 바로 인생의 승리인 것입니다. 욥이 인생의 말할수 없는 고통과 시련속에서 무슨 고백을 했습니까? “주께서 내가 가는 길을 아시나니 이 단련을 받은 후에 나는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욥23:10)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을 알았습니다. 최후의 결과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같은 것을 만세전에 아시고 끝까지 간섭을 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대신 나를 끌어 안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계획 앞에서 나를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이곳,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러분을 지체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가며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 동성교회가 이곳에 세워진지 50년이 되는 오늘, 지난날을 되돌아 볼 때 50년 동안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꾼들을 세워나가심을 보았습니다.
비록 우리의 허물도 연약함도 있었지만, 그것마져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복음전파’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내 삶을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도우시고 내 성품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 삼아 새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게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고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경험케 하는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