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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9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롬 8:31-3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9-09-29 | 조회: 869
넉넉히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롬 8:31-39. 2019. 9/29

 

요즘 가뜩이나 삶이 어려운데 ‘아프리카 돼지열병’ 때문에 양돈업을 하는 농가에 깊은 시름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중국은 돼지고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한 4억마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 절반이 가까운 2억 마리가 이 병균에 감염되어 살 처분을 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아예 돼지가 없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농가도 초비상입니다. 이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한 농가에 퍼지면 그 균은 동물을 통해, 자동차를 통해,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지게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을 아까워도 다 죽입니다. 살 처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농가가 이 균에 오염되면 주변에 의심받은 멀쩡한 돼지들도 손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다 땅에 묻는 그 광경은 정말 고통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자연계에 일어나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보았지만, 이 땅에 죄가 옴으로 자연계가 탄식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 역시 인생에게 다가오는 죄로 인해 무너져 가는 인간 파괴에 대해 얼마나 탄식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도 우리의 회복을 위해 탄식을 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아가지만, 원치 않는 일들로 고통이 끊이질 않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하루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온갖 고난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마치 온 세상이 고통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 고해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무풍지대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성도들 중에도 많습니다. 교역자들이 제출한 심방보고서를 보면, 성도들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아픈 사연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픔, 시련, 고난 등의 문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종류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고난이 닥치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든 견디지 못하는 고통 때문에 고통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뒤집어엎어버립니다. 고난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뒤엉켜버립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상실감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문제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반응하지도 고난에 대해 체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고통과 고난이 따라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악형을 받았습니다. 희롱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 당하기도 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광야를 방황하며 유리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토굴 속에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기적이 없다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거하는 것을 원하신다면 오히려 감수하며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도대체 이런 고통이 따르면 누가 예수를 따르고 살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 ‘그러나’라는 말부터 좋습니다. 그 모든 역경과 환난을 단번에 뒤집어엎어 버리는 강력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환난과 박해가 아무리 크고 강하다고 하여도 그 모든 일들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말씀이 되고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바울은 4가지 질문형식을 빌어 넉넉하게 우리 인생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①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②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33) ③ 누가 우리를 정죄 하겠는가(34) ④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확신이 가면 이 같은 외침을 할 수 있을까요?

 

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31)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 ‘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데 누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는 한, 그 사랑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건져 놓으신 우리를 포기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를 사랑해 주실까? 나같이 이기적이고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나를 받아주실까? 하는 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든지 또는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던 사람에게도 그 정도의 차이는 다를지라도 가끔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수가 있습니까? 하며 바울의 의심의 독버섯이 솟을 때가 있습니다.

 

욥의 아내를 보십시오. 자식도, 재산도, 멍에도, 집도 다 잃은 채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왓장을 가지고 몸을 긁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욥2:9에 보면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현대의 번역은 이 본문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을 지키고 있단 말이요? 참 속터지는 양반 다 보겠네. 차라리 하나님한테 욕이나 퍼붓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소!” 그리고 뛰쳐나가지 않습니까? 욥의 아내뿐만 아닙니다.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힐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논리를 가지고 마귀가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로마 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기에 내여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끼던 독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어두움의 권세에 내 놓고 채찍에 맞게 하고 수모를 당하게 하고 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랑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대신 나를 끌어 안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나는 주님을 때로 잊어버리지만 때로 원망도 부정도 해보지만 심지어 주님을 배신을 하였지만 그 분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독생자까지 내 놓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들 못 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이 은혜, 이 사랑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Ⅱ. 죄책감을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왕은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기타의 많은 죄도 있겠지만 대표적인 죄가 밧세바와 통정한 것으로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그의 남편을 죽였으며 그리고 깊이 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 할 때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다윗의 참회록을 보면 계속되는 그 많은 회개의 말 가운데서 밧세바를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요사스러운 여자 때문이었는데 하는 원망의 소리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세상을 탓하지도 환경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하는 간사함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죄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세상은 다윗을 정죄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를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반가운 하나님이요, 전에는 진노의 하나님이더니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지난날의 음성은 두렵고 저주스럽고 낭만적이었으나 이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임재 앞에 나의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형편없는 길로 갈 때에 당장 벼락이라도 치셨더라면 그것을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아 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 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정죄하고 누가 나를 송사합니까? 여러분 이 죄사함의 은혜를 입게되면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33-34에 보시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간구하신 자 그러면 내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는 빽이 든든하니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은혜받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하늘의 비밀한 것들을 체험하며 살아도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도 보지 말고 우리의 언행에 모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활이 비록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말고 시종일관 예수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되 회개의 영을 부어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시고 당신의 보혈로 우리의 연약함을 씻기워 우리로 정결케 하시고 깨끗게 하십니다.

 

Ⅲ.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무서운 시험이 덮치면 평안할 때 가졌던 확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5절에 일곱 가지의 항목이 나옵니다. 또 38절과 3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는 아홉 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35절과 38절, 그리고 39절에는 도합 16가지의 항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게 다 신앙생활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견딜 수 있나요? 그러나 단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현재의 것이나 미래의 것이나 그 어떠한 것으로도, 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시시한 3류 소설에 나오는 남 녀간에 주고받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한번 화끈하게 불붙었다 식어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결코 끊어지지도 않고, 결코 약하지도 않고,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또 정죄하지나 안을까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란과 핍박을 당할 때 믿음이 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입니까? 37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나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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