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열매 맺기 위하여 눅13:6-9. 2019. 10/6.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소개할까 합니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저는 이 시를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의 문학적인 주제나 사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이 시의 배경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느껴지는 것은 도 이 시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피어나지 않습니다. 봄에 심기운 씨가 한 여름의 천둥번개와 비바람을 맞고 가을의 찬 서리를 맞은 후 비로소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열매를 맺는 가을이 오기까지는 무척 힘들고 아픕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면 그때 열매는 맛 좋고 빛 좋은 모습을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 누리는 마지막 기쁨은 환희 그 자체입니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비옥한 시간을 가꿀 수 있는, 내가 거두어 드릴 열매가 없다면, 그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내 인생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질문을 묻고 있을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3장의 본문을 같이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 누가복음 13장을 흔히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가 나무의 비유, 이렇게 일컬어 말합니다. 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열매를 얻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열매가 있어야 할 이 나무에 열매가 없는 이유는
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원래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입니다. 특히 무화과는 그 이름 그대로 꽃 없이 바로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무화가 나무의 책임은 열매 맺는 게 책임입니다. 그것이 무화가 나무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장식용으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요즘은 뭐 꽃꽂이가 발달해 가지고 별거 가지고 다 그것을 어떤 데코레이션에,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마는 적어도 성경이 쓰여진 예수님 당시만 해도 무화과나무는 절대로 장식용은 아니였습니다. 재목용도 아니에요 뗄감용으로도 쓰여 질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목적,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 생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①.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를 다룰 때 늘 일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격의 열매입니다. 인격의 열매,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갈5:22-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여기에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우선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누구나 다 좋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나누어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열매라는 단어는 단수형입니다. 하나의 열매입니다. 한 열매 속에 있는 9가지의 특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열매는 한 인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한 인격은 누구의 인격일까요?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분, 화평, 진정한 평안으로 그의 내면의 인격이 견고했던 그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그리고 정말 오래참을 줄 알았던 그분,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열매를 맺느냐는 것은 내가 그것도 신앙생활의 연륜이 얼마나 되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그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변화 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성화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풍기는 향기와 기품이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열립니다. 관계에도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품이 넓어져 사람과의 관계가 넓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영적인 변화가 세상에도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영적 변화에서 멈추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이 기뻐하시는 내 삶의 열매가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②. 또 하나의 열매는 바로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사람들마다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다릅니다. 결국 인생은 그 사람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질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에 의해 인생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진 그 분야에 시간과 열정을 쏟게 되고 결국은 그 관심이 인생의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좋고 의미 있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그 인생이 격조가 있고, 무가치한 것에 관심을 쏟다 보면 그 인생이 하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관심은 그 인생의 방향이고 목적이며 사명이 됩니다.
오늘 잠시 멈추었지만, 로마서에 보면 왜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까? 롬1: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 사도를 보면 그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면 관심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에 흥미가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것에 관심이 생기면서 인생이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관심은 딱 하나, 로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열망입니다. 영혼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말로 말하면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한 마디로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로마교회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다는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큰 인물은 그 마음가짐이 다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삽니다.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누구에겐가 무엇이라도 나누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소인배들은 채권자의 마음가짐으로 삽니다. 늘 자기 주장하고 늘 불평합니다. 제대로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나눌 줄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 교역자와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들, 이웃사람들, 직장 동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금년 한해를 결산해 가야할 이런 시점 앞에 서서 우리는 이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내가 금년 한해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더 닮았을까? 그리고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전도에 대한 열망이 있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Ⅱ. 찍어버리라
지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어찌해서 땅만 버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을 버린다, 무슨 말입니까? 기대했던 열매가 없습니다.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고 가꾸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주인 입장은 단호합니다. 여기서 “찍어 버린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나무를 베어버린다”고 말할 때 이스라엘에서는 “나무를 뽑아버린다”고 말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에서 나무가 죽으면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뽑아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땅이 넓은 곳에서는 배어 내고 그 자리에 무엇을 안 심으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좁기 때문에 베어내고 그루터기만 남기면 땅을 못 씁니다. 그러니까 뽑아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유달리 태풍이 무섭게 불고 있습니다. 태풍이 지난간 자리는 정말 처참합니다. 인명이 피해가 나고 가옥이 침수가 되고 한 순간에 보금자리가 쑥대밭이 됩니다. 그리고 농작물의 피해는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디고 열매를 끝까지 맺는 나무를 볼 때 너무 고맙지 않습니까? 이 본문의 비유는 우리에게 너는 정말 성도로서 가치 있는 인생으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며 살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의 영향력, 대단했죠. 숫자는 현대보다는 훨씬 크리스챤의 숫자는 적었어요 그러나 영향력은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그렇게 핍박하던 로마가 AD313년에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자그만치 300여년 동안 교회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거의 씨가 말랐는줄 알았는데 거대한 로마가 복음 앞에 무너진 것입니다. 당시 놀라운 사실은 로마 안에 기독교 인구가 불과 2.7%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당시에 무서운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든지 콘스탄틴 황제마져 십자가 앞에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예수를 영접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초라한 사람들 밖에 없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거대한 세력을 주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속에 거룩한 열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핍박이 있고, 불이익을 당하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기는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휩쓸리지도 타협하지도 끌려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 다른 나무에게 필요한 수분이나 광물질의 자양분을 다 빨아드리면서도 열매는 맺지 못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도 천국에 못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도 천국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라고 호되게 닦아 세웁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Ⅲ. 여기 보시면 포도원지기가 탄원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그런데 이 번역이 조금 약해요 더 달리 번역한다면, ‘금년 한번만 봐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내가 두루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셔도 저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포도원 주인이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 명하자 포도원지기가 한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번에 한번만 더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더 정성을 다해서 가꾸고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누구입니까? 한번 더 기회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찍히고 뽑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두어라” 자비의 선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찍히시고 우리가 대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정죄받으시고 우리는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속박을 당하시고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찢기시고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으니 우리는 다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았으니 우리는 다시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시 실패하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일에 성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찍어 버리라” 말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가만 두어라” 말씀합니다. 직장은 학교는 생존경쟁은 우리에게 “찍어 버리라” 말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가만 두어라. 혹시 부족하면 내가 다시 거름주리라. 가만 두어라.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게 하라. 내가 저들의 거름이기 때문이다. 내가 거름이다. 그래서 너희는 살았다. 내가 거름이 되리라. 그래서 너희가 살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혹시 나와 같이 너희도 할 수 있겠니? 이 썩은 세상에 썩은 것을 자꾸 들춰내는 사람 되지 않고 내가 스스로 거름이 되겠다고. 너희도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니? 내가 당신의 거름이 되겠다고”.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이 강단에서 수없이 외치는 말씀을 또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우리를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쓸모없으면 용도 폐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을 가지고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 자리에서 다시금 당신의 보혈로 내 영을 , 내 삶을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꼭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시 실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태신자를 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에 동참한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여기 누가 예외가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목회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이제 빚 갚는 생애를 살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뭐 여러분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은혜에 빚지고 사는 자들 어떻게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요? 탈무드에 보니까 이런 유명한 말이 있어요. “빚진 자들이여! 힘을 합하십시오. 그리고 누군가 당신들 곁의 한 사람에게 축복의 등불이 되어 주십시오.” 나는 이번 집회가 행사나 프로그램으로 끝나지를 않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합시다. 이제 계속 기도하고 찾아다니면서 정말 상대가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나아갑시다. 골방 기도와 새벽에 교회 오래 오래 머물러서 한 생명을 끌어안고 기도하십시다.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