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강 이제는 기도할 때입니다. 렘 33:1-3. 2019. 10/13.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한자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을 때 우리가 흔히 쓰는 말입니다. 요즈음 우리네가 처한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이 아닙니까?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가 간의 질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현실입니다. 또한 남북 긴장의 상황이 심각합니다, 국내적으로도 나라가 진영논리로 두 동강이 났습니다. 참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에 따른 내수 침체와 물가고, 실업률의 증가와 취업난, 자살률의 증가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정황은 정말이지 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사면초가의 상황이 아닙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마치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열심이 식어졌습니다. 식어진 가슴!’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께서 얼마나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토하여 내치겠다” 이런 단어를 사용을 하셨겠습니까? 요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절박함이 점점 식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전보다 많이 풍요로워지고 유식해졌다고 당연히 신앙도 좋아졌으리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옛날 한국초대교회 성도들은 가난하고 무식했지만 순수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한겨울 추위에도 수십 리, 심지어 수백 리를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온 밤을 새우고 금식했습니다. 말씀대로 성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 덕분에 부유해졌고 그 덕분에 유식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부요함과 그 유식함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다 보니 점점 복음에 대한 갈망이 식어졌습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한 교인을 향해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주님께서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토하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이제 우리는 내일부터 새벽을 깨우는 2019년 기도 대행진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새벽 기도는 무엇보다 내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또 교회가 이 시대 앞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엎드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기도 자리로 나오고, 힘을 다해서 기도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주전 587년경 유대나라의 예례미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가 또한 그랬습니다. 당시 그의 조국 유다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고 수도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선지자 자신은 조국의 운명을 예언하다가 왕실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렘32:2을 보면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나” 보십시오. 그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담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세상 앞에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감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바로 그때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째로 임한 것입니다.(렘33:1) 이 임했다는 말은 참 신비한 단어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를 사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Ⅰ. 사랑하는 여러분, 왜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힌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32:1-5절에 잘 이야기를 해 줍니다.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5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여기에 보면 예레미야가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것이고 왕이 포로로 붙잡혀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메시지를 들은 왕이 뭐라 하겠습니까? 당장 감옥에 쳐 넣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레미야는 통곡과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왜 그를 눈물의 선지자로 알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그는 많은 어려움에 대한 메시지를 그 시대 앞에 증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약관 20세 나이에 하나님으로부터 강권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나돗 출신입니다. 아나돗은 당대 유배지입니다. 사실상 몰락한 후손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정적들로부터 제거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아이라 말을 못하고 또 성격이 소심합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핸디캡 때문에 하나님의 시대적 부름에 부인하고 사양하다가 결국 눈물로 눈물로 이 부름의 길을 순종하여 나섭니다. 그런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내란죄에 해당하는 중형을 선고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겠습니까? 인생의 밤을 맞은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끔씩 뜻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인생의 밤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 생활 하는 가운데도 이처럼 뜻하지 않는 인생의 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습니까? 아니면 직장을 잃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됩니까? 또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 30대 후반에 속한 대부분의 남자들은 직장에 대한 환멸과 불만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밤이 오고있는 증거입니다. 30대 초기에 큰 꿈을 가지고 출발했던 직장생활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는데 어느덧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이것이 내가 쏟은 삶의 전부인가” 하는 환멸을 느끼기 시작할 때 밤이 온 것입니다. 아마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싫어하는 고난과 환란의 밤을 주십니까? 인간은 밤을 통과하지 않으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고약한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의 자국을 남긴 큰그릇으로 쓰여진 사람들마다 다 밤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부분 밤을 통과하신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의 밤을 맞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의 줄을 바짝 쥐어야 합니다.
지금 시위대 뜰에 갇혀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바로 그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지금 그 하나님께서 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부르짖으라’는 히브리어로 ‘케라’(kera)라는 단어입니다. 특별하고 간절하게 마음을 쏟는 기도를 말합니다. 강력한 기도입니다. 왜 이처럼 강력하게 부르짖는 이유가 무었습니까? 다른 게 아니잖습니까?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가진 강함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했고 그 약함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할 수 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약함이 있습니까? 그것을 내 안에 머물러두면 우리는 평생 세상에서 멸시당하고 부끄럽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약함을 통해 주님을 더욱 굳게 붙잡는다면 우리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이 주신 권능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삶에 있어서 기도 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Ⅱ, 다시 묻습니다. 그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십니까?
2절에 보면 ‘그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행하심’, ‘만드심’과 ‘성취하심’은 모두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그는 창조주로서 또한 약속한 바를 반드시 만들어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이십니다. 본문 2절에 그가 이런 신실하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세 번이나 사용하며 강조합니다.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 그분은 스스로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응답을 확실히 믿어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레미야에게 다가오신 그 주님은 누구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삼위이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한번 택한 인생에게 영원한 동행자로 우리의 삶을 인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분 앞에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복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그 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 살다보면 우리 성도들도 별의 별 일이 다 겪습니다. 천국 백성이 됐지만 아직 천국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에는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결국은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할렐루야!!
Ⅲ. 오늘 본문은 단순한 응답이 아닌 크고 은밀(비밀)한 일의 응답을 약속합니다. 3절은 말씀합니다.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리라 부르짖으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 ‘크고 비밀한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 본문에서의 그 크고 은밀한 약속은 이스라엘의 용서와 회복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조국 유다가 풍전등화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의 처해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그들이 참으로 기도하고 주께 나아온다면 지금의 그들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위대하고 비밀한 응답의 내용은 렘33:6-8에서 전달되고 있습니다.
6-8절입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 낼 것이며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차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매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그런데 이것이 왜 은밀한 약속 혹은 비밀한 약속이어야 할까요? 지금의 현실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기 때문에 알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기꺼이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번영의 기회를 제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의 비밀을 털어 놓습니까?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에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소통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소통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알려진 비밀을 간직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오늘은 당장은 고통과 아픔이어도 참고 기도하며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내일은 이런 비밀의 실현을 기다리는 설레임의 인생이요, 기다림의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해 전 미국 직장에서 갑자기 퇴출을 당하고 자포자기하여 가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만의 방황 끝에 집에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나는 죽고 싶소.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오.”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은 아직 한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기도해 본적이 없잖아요.” 아내의 이 말은 그에게 커다란 찔림이 되어 다가왔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나는 이 일에 대하여 기도해 본적이 없지.”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작장과 상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건축업을 시작했고, 5년 만에 자신의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을 위해 여기 저기 여행을 하는 동안 미국의 호텔이 너무 비싸든가 너무 싸구려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기도제목을 갖게 됩니다. 가족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 비싸지도 싸지도 않으면서도 분위기가 있고 수영장이 있는 격조 높은 서비스를 하는 중간 가격의 호텔을 건축하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호텔에서 사람들이 집을 떠나서도 집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건강한 가족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술은 팔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세계적인 호텔 체인인 홀리데이 인(Holiday Inn)입니다. 이 호텔의 창업자 케몬스 윌슨(Kemmons Wilson)의 스토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케몬스 윌슨처럼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모든 노력을 다 해 보셨다구요? 정말 기도해 보셨습니까? 아니 부르짖어 기도해 보셨습니까?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 보셨습니까? 기도로 고난을 극복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부가 함께 새벽을 열고 주께 나아와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영적 가족들인 목장 교회 식구들과 함께 나아와 기도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부르짖어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중보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일부터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시나요?’라는 주제로 특새를 합니다. 전도는 기도 준비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힘, 내 노력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엎드려야 합니다. 은혜 주시고 성령 충만케 하셔서 주님이 한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으신 것처럼 나에게도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 심정으로 새벽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평소 품고 기도하던 영혼들을, 그 열매를 추수하 는 기회입니다. 꼭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