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롬9:1-5. 2019. 10/27
지난 주 한 생명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수고 하신 분들과 이처럼 전도를 받아 함께 예배 참석한 분들에게 주의 은혜가 엄치기를 축원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계속 보았던 로마서를 오늘부터 다시 보도록 합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살펴보았지만, 로마서 중에서도 보석의 가장 영롱한 부분과 같다고 했습니다. 굉장한 확신과 기쁨에 찬 바울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9장으로 넘어오면서 먹구름이 끼는 듯 어둡습니다.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기쁨을 맛보았지만, 동족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보며 굉장히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워하면서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유대인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으로 나셨고 모든 뿌리가 유대인인데,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출현하고 복음이 나타났을 때는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Ⅰ. 마음의 고통 -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심정은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Ⅱ. 하나님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 몸부림치는 기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도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보았습니다. 견딜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얼마나 큰가를 보았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자기를 그 완악함과 그 더러움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의 용서의 진액으로 사랑의 보혈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열왕기하 7장을 보면 사마리아 지방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그 때에 벤하닷 왕이 아람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성을 포위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나마 외부에서 들어오던 양식 줄도 끊어져 성안에 갇힌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길이 없었습니다. 앞장인 6장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성문 어귀에 있던 문둥이 네 사람이 서로 의논을 합니다.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도 먹을 것이 없고, 여기 있어도 죽을 테니 차라리 아람 군대를 찾아가자. 여기서 죽으나 가서 아람 군대의 칼에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가자” 결정합니다.
그런데 가보니 아람 군대는 도망가 버리고 그들이 남겨놓은 음식과 양식 그리고 금은보화가 가득 널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음식을 마음껏 먹고 보화를 감추었는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 성에는 오늘밤에 죽는 사람만도 많을 텐데 우리가 이 일을 알리지 않으면 큰 죄가 될 것이다.” 그래서 네 명의 문둥병자들은 성으로 달려가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사마리아 성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문둥병자처럼 양식이 있는 곳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표를 알고 의미 있는 인생, 마지막 종착점을 알고 있습니다. 풍족함을 누리는 우리들 곁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살인 방조죄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트에 관한 영화 <로베로 장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레지스탕트들이 감옥에서 끌려나와 사형 당하게 되었습니다. 포로들이 기둥에 묶이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외칩니다. “나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온 사람입니다. 나는 저항운동과는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나는 무죄입니다.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독일 군들은 아랑곳 않고 그 사람을 기둥에 묶습니다. 그때 한 레지스탕트가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당신의 죄입니다. 지금까지 5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우리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늘 당신이 죽어야 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죄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실은 적극적으로 죄를 살펴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도 죄지만,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인데도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가 해야 할 중요한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책임으로 ‘Social Mission’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야 될 분명한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바로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사람의 육적인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면, 영혼의 굶주림을 돌보고 관심 갖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더 본질적인 일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여 지금도 죽음을 향해 자기 생명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생의 가치와 목표를 일깨워 주고 복된 인생을 살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Ⅲ. 성도의 최고의 소망 - 영혼 구원
이번에 우리가 태신 자를 세우고 지난 주 새 생명 축제를 했습니다. 모두가 수고했습니다만, 여기 모인 자신들은 자신을 잘 알 것입니다. 풀러신학교에 맥가브란이라는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교인들 중에10%정도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열심히 섬기는 스스로 알아서 하는 사람 10%가 있다는 것입니다. 80%는 살짝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는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는 이 10%의 열심히 있는 분들에게 열심히 일하게 만들고 살짝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워서 이 복음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잠들어 있는 10%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깨우면 화를 내기 때문에 나두고 80%를 깨워 복음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 교회나 미지근한 사람 80%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주는 도전입니다. 우리 동성교회가 세상을 향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는데 복음 앞에 뜨드미지근한 사람들 80%가 어떻게 복음 앞에 서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느냐 너무 중요한 과제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변화 될까요?
이상훈 교수가 선교 적 교회를 이야기 하면서 도전을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come and see' 와서 보세요. 불행하게도 지금 한국 교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컴엔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불러서 우리들이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들이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go and show 우리들이 거서 복음이 문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변화된 삶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삶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앞에 신뢰를 주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삶이 필요 합니다. 바울의 이 격한 메시지를 보세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이는 구원의 상실을 말합니다. 그 정도로 자기의 동족의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구원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방관할 수가 없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쉰들러는 독일의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이 죽어갈 때 자기 돈을 들여서 유대인들을 구출해내는 일을 합니다. 나중에는 천백 명까지 살려냅니다. 원래 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는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합니다. 그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고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과 친분을 맺으면서 냉혹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될 유대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쉰들러는 브린리츠 수용소를 탈출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주인공인 오스카 쉰들러가 더 많은 유태인들을 구하지 못한 자책감에 떨면서 이렇게 절규한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왜 차를 팔지 않았을까? 이 차를 팔았더라면 10명은 더 구할 수 있었는데, 이 핀을 팔았더라면 2명은 더 구할 수 있었는데, 이 금 조각으로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가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유태인의 지도자인 이츠하크 스테른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대신해서 오스카 쉰들러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반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반지에 기록된 히브리 메시지를 번역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영혼구원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본문에서 바울이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전도도 할 만큼 했고, 동족들을 위해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면 자신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입장을 정리하고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큰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입니다. 가족 친척 혈육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바울이 얼마나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끊어질찌라도”라는 말은 8: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는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무엇이라 말합니까? 외부의 그 어떤 힘으로도 나를 그리스도에게서 끊을 수가 없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고 저주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게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민족과 내 가족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한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크게 맛보았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외쳤던 감격이 저에게도 임했습니다. 8장 전체를 외우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거듭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 구원의 감동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9장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울에게 있던 그 고통이 제 안에는 하나도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있는데 통증이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없다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없다면 우리는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는 행사에 끝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세운 태신자 분들이 지난 주 안 나왔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 태신 자를 세우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묻습니다. 전도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전도하면 내가 깨어납니다. 내 신앙이 살아납니다. 교회에 새 가족이 들어오면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이 복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이 참된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