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구원 롬 9:19-29. 2019. 11/3. 주일 설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1959년대 한창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입니다. 가는 곳마다 집회를 하고, 가는 곳마다 전도를 해서 수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자 매스컴을 타고 그 젊은 청년 목사가 미국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 템플턴(C. Templeton)이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가슴에 불을 안고 전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유럽으로 순회하며 전도할 때도 같이 가서 교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템플턴이 빌리 그래함보다 더 유능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전도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1200석 교회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를 만났습니다.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 사진은 북아프리카의 여인이 굶어 죽은 아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늘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사진이었습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진을 얻었나 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엄청난 가뭄으로 사람들이 고통 당하며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짐승들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템플턴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비인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비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다면, 어떻게 죽어가는 이 아이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다음부터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예수님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삶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이 사람은 한 순간에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불가지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어?' 하고는 다른 길로 들어갔습니다. 참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전도를 해보면 이 사람은 믿을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분인데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안타까움은 더해집니다. 부모님이 교회 직분자이셨거나, 주변 형제들 가운데 알만한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거나, 심지어 찬송도 알고 성경도 알고 있는데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볼때에 안타까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우리 마음 안에는 더 큰 감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울도 자신의 동족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동족이 구원받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엄청난 혼란스러움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유대인의 구원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유대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선택하시고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출발해서 요셉을 통해 한 민족을 일으키시고,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일들이 드러나고, 다윗을 통해 이새의 줄기에서 그리스도가 나게 됩니다.
그런데 언약의 백성으로서 할례를 받고 특별한 백성으로 쓰임 받았던 유대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굉장히 큰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큰 고민 속에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버리셨나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고민을 하던 바울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성경적인 독특한 명칭 하나를 본문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27절에 등장하는 ‘남은 자’라는 단어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 남은 자란 말 속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①. 남은 자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②.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남은 자’를 ‘그루터기’라고도 이사야선지는 표현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역사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작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대부분 자신의 동족이 불신앙의 길로 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깊은 탄식과 또한 그 탄식을 넘어서는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그 성을 위해서 기도하던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그 남은 자 한 사람때문에 롯이 멸망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온갖 폭력과 거짓으로 만연되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지었던 노아가 있었습니다. 그 한사람 남은 자로 인해 온 인류가 홍수로 멸망당할 때 인류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를 포함해서 매우 소수의 그룹에 속하는, 작은 무리들이 이 구원의 영광을 누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놀라운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Ⅰ.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 때문입니다.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것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하는가, 하나님은 편애하는 분인가, 하나님은 왜 불공평하게 사람을 다루시는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야곱이 에서보다 더 나은 선택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야곱입니까?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와 설명이 있어야 그것을 납득합 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명이 없이 그냥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모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변을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만한 근거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이 비유는 구약 예레미야 18:1-4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것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지금 토기장이가 녹로라는 작업대에서 그릇을 빚습니다. 녹로라는 말은 발로 빙빙 돌리는 기구인데 이것을 돌리면서 그 위에 흙을 빚어가지고 그릇을 만드는데 빙빙 돌리면서 만들어 보니 잘 안돕니다. 그러니까 확 찍어 뭉개고 짓이겨 다시 만듭니다.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듭니다. 그런데 토기장이가 이런 것도 만들고 저런 것도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왜 이런 그릇 만들었느냐, 왜 나는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쉽게 표현한다면 “너 입조심해, 너는 지금 너 자신이 누군지를 잘 몰라서 그래. 진흙을 빚어서 질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를 생각해보라. 그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느냐! 왕의 수랏상에 올라가는 식기를 만들기도 하고 구박을 받는 요강단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요강이 된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하느냐고 대들 수 있겠는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해. 너의 위치가 뭔지 아느냐?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진흙이요, 질그릇에 불과하다 창조주에게는 자유와 주권이 있어. 그것을 놓고 네가 이러니 저러니 하고 따질 수가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찌하던지 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와 자유와 권리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처분에 따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 되고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기로 작정한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고 불쌍히 여겨 택하신 사람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것이 어디 우리 뜻대로 되는 일입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작정대로 하시는 절대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작정 때문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Ⅱ. 남은 자가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25-26절에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자라 부르리라 너희ㅐ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지금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을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보여주면서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기를 ‘너 장가가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호세아의 생각에는 에덴동산의 이브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동경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변입니까? 음란하기로 소문난 길거리의 여인인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으며 가정을 꾸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가끔 중매를 하다가 실수를 할 때가 있어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만 처음부터 이와같은 중매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중매하십니다. 창녀와 결혼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호세아는 부득불 결혼을 합니다.
결혼생활 가운데 2남1녀의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호세아의 사랑을 받으며 그 가정에 충실한 아내가 될 만도 한데 이 여자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딴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 버립니다. 결국 그 여인은 사창가에 전전하는 노예가 되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은 지경에서 호세아의 마음은 일단 아팠지만, 일이 이정도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본래부터 창녀가 아니었습니까? 호세아도 할 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일생의 절반은 이렇게 버렸으니 다시 장가들어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시작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호세야야 그 여인을 사랑하라! 음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여러분! 다른 사람의 연애를 받아 더러워진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게 가능합니까? 아무리 보아도 고멜은 사랑 받을만한 여인이 못됩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 여인을 찾아, 그것도 돈으로 노예된 여인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기 집으로 데려 옵니다. 이제 호세아는 이 역겨운 여인을 불러다 놓고 이야기합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나도 너만 사랑할테니 제발 너도 나만 사랑해다오. 그리고 과거는 묻지 않을것이니 이제부터는 오래오래 깨끗한 사랑을 해달라며 애원의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고 버릴수 있는 이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의 밑바탕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 조건 없는 긍휼의 풍성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단해서도 아닙니다. 내가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도 아닙니다.
Ⅲ.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자로 우리가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율법의 행위를 좇아간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았던 이방인 중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을수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도대체 내가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설명이 안 되지만 딱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거입니다. 이 믿음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믿음이 생긴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왜 나를 선택해주셨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선택을 아는 것이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고, 이 믿음이 생긴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엡 2: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았고, 이 믿음은 그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 외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말씀이 믿어지고 구원의 진리가 믿어지는 것이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택한 백성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믿음으로 반응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붙잡아야 합니다.첫째,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직하지 못하고 종종 그 뜻이 바뀌고 계획한 것을 이루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신실하시고 완전하시며 그분의 계획은 철저한 뜻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해서 항변하려 하지 말고, 말씀이 주어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바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하지만 이해할 길은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예수를 믿었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이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죄를 조금 덜 지었나,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택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오해하고 넘어지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선택 받았는가 아닌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바울을 보세요!! 그는 결코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선택한 그 은혜 앞에 이방인의 사도(선교사)로 세움 받아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가 세운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기록한 서신들은 신약성경으로 공인되었는데, 신약 전체 가운데 무려 3분지 1 가량 됩니다. 오늘의 서구 문명과 세계선교의 기초가 바로 그의 변화로 인해 시작된 겁니다. 그는 이렇게 복음 전도자로 살다가 마지막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AD 67년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를 경함한 바울을 가리켜 역사가 A. 토인비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바울을 싣고 가는 배는 유럽을 싣고 가는 배였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다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 압송된 것 같지만, 사실은 로마를 통해 유럽 전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됨으로 유럽을 기독교 문명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내가 남은 자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 여기에 있다면 우리가 분명히 이 땅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남은 자로서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여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이 한해를 보람차게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