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 감사의 사람 시30:1-12. 2019. 11/10.
몇 해 전에 국민일보에 나온 기사 내용입니다. 미국의 일간지인 뉴욕타임스에서 인류 역사상 ‘제일 잘 살았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조사 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뽑힌 사람이 다름이 아닌 다윗 왕이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다윗보다 더 잘 산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한 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겐가 인정을 받고 산다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아가는 것은 요즘 다원화 된 사회에서 정말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다윗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값진 생애를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을 했습니까?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행13:22절의 말씀을 보면 다윗을 무엇이라 소개합니까?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인물이 아닙니까?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불충한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도 인간관계에서 느껴서 아시지만, 직장 생활이라든지,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람도 그리고 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도 아낌없이 칭찬하는 다윗, 그런데 다윗에게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늘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감사라는 단어입니다. 어느 시인의 이야기처럼 '시편의 골짜기 골짜기마다 다윗의 감사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고 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다윗처럼 감사생활이 일관된 사람도 드뭅니다.
오늘 함께 본 본문은 ‘다윗의 감사 생활’에 대해 잘 증거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신앙을 가리켜 훌륭하다고 평가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감사 신앙’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이게 잘 안됐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신앙의 수련을 통해 환경이나 조건을 초월해서 항상 감사하는 신앙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늘 감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다른 이들처럼 환경 조건에 따라 휘둘리고, 그의 마음이 흐렸다 갰다 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낙심했습니다. 그리고 형통할 때는 교만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수련하고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늘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Ⅰ. 다윗은 실패를 통하여 감사를 배웠습니다.
다윗은 형통할 때에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교만했죠. 그러다가 고난을 당했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은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신앙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 6절을 보면, 그는 과거 형통할 때에 영원히 그 인생이 요동치 않을 것으로 착각하고 장담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사실 자신이 그만큼 축복 받고 형통한 삶을 살았던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한 동안 잘나가니까, 좀 잘되니까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잘되는 줄을 알고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금세 넘어집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그런 사실을 다윗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웠다”는 것은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우심으로 다윗의 인생이 정상까지 오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순간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윗은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서 인생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한순간에 지위와 가정을 다 잃고 유랑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의 자리까지 이르는 절망이 그의 삶을 덮어왔습니다.
9절입니다. “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최악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무너지면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건강도 잃고, 원수들 앞에 수치를 당하는 자신의 그 초라한 모습 앞에 얼마나 후회가 많겠습니까?
이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인하여 인생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많은 사람들은 ‘중도하차’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잘 달리다가도 어떤 사람은 갑자기 폐병 같은 무서운 병을 얻어서 학교를 휴학하고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정치적으로 밀리는 바람에 감옥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인생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물론 절망감과 함께 이제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좌절감일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나를 찾지도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사람의 손에 붙들려 사용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비참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참한 순간에 자기를 덮고 있던 오만과 고집의 가면을 벗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데 너무 내 자신만 믿고 교만하게 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은 지금 이 어려운 자리에서 한 발만 더 밀어붙이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인데, 그 동안 무엇을 믿고 그렇게 날뛰었는지 기가 막힌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코만 잠깐 막아도 숨이 막혀서 죽을 수밖에 없고, 당장 몇 끼만 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여기 다윗이 이 고난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서 무엇을 합니까? 8,10절을 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여기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처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땅에서 아직 사명이 남은 것 같은데 원수들에게 무력하게 고통당하고 또 질병의 무게에 눌려 죽음 앞에 섰다면 얼마나 큰 통증이 일어나겠습니까? 다윗은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Ⅱ.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며 감사했습니다.4절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이 다윗의 감사는 그냥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의 심령 속에 터져 나오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은혜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을 뜰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눈을 뜬 후에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서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힘들 일상이지만 오늘도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나 일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오늘도 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손을 뻗어 누군가와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다는 것, 낙엽이 지는 가로수를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계절의 변화 속에서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지금 다윗은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뛰어나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해도 주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을 멈추게 하시면 우리는 오늘로 우리의 삶을 마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주셨던 것들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누리며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건강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가정의 행복이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신다면 우리의 계획과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유를 불어버리시면 아무리 많이 쌓아놓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아 가버립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풍요롭지 못하지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우리의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무엇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삶에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모두 감사거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 라고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 가득 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Ⅲ.다윗은 인생의 소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기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5-6절에서 말합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가 이 구절을 쉽게 변역 한다면 "그의 노여움은 잠간이요, 은총은 영원하니,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하박국을 보세요. 다 잃었습니다. 합3: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입니다. 과수원마다 애써서 지은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이젠 어디를 찾아보아도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죠.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3:18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기 '즐거워하며' = '에엘로자'와 '기뻐하리로다' = '아길라' 이 두 단어는 신뢰와 소망하는 대상에 대해 확신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생존권이 박탈될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 빠져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쳐 나갑니다. 로마서 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모든 것을 주십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우리를 위해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한 해를 사십시다.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믿음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 나가십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비록 내가 저녁에는 눈물을 흘릴지라도, 아침이면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11-12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우리는 유난히도 많은 일들을 겪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가 참 어렵고 힘든 시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너무나도 낮고 춥습니다. 경제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우리를 평안하게 해 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경제가 너무나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1997년 이후 겪었던 IMF시기보다도 더 힘든 경제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다 큰일났다,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담대해야 합니다.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다시 4절입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여러분! 아무리 주변이 어렵고 힘들어도 아무리 먹구름이 짙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빛나는 태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환경과 여건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 모른 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시는 그분이 내 인생을 붙잡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 앞에, 나를 구원의 자녀 삼으신 그 분 앞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TV와 라디오 진행자로 유명한 드보라 노빌이란 분이 쓴 ‘감사의 힘(Thank you Power)’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말이 인생 전체를 바꿀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비밀 열쇠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가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건강을 삶을 살게 하고, 면역력을 길러 준다고 합니다.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말하는데 단 0.3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이 0.3초의 감사의 습관이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평균 10년 이상 장수하게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감사는 삶을 변화시키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주보 속에 추수감사절 헌금봉투가 들어 있습니다. 다섯가지 기도 제목을 적어보십시오. 일년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헤아리며 드리십시오. 감사는 표현할수록 커집니다. 감사는 기록할수록 더 오랫동안 기억이 됩니다. 감사는 나눌수록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0.3초의 기적 바로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의 고백에 담겨있습니다. 감사의 고백은 우리의 삶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감사는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을 품게 합니다. 탄식의 한숨 속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나온 2019년을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주일입니다. 기쁜 일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 돌리시기를 원합니다. 자!! 다시 옆에 분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다윗의 삶에 베여 있는 이 감사가 나의 삶 속에도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