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심 롬10:1-7. 2019. 12/1. 주일 설교
“나는 녹이 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라며 한생을 주를 위해 산사람이 있습니다. 18세기 영국 부흥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휫필드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죤 웨슬리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이 분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입니다. 초인적인 힘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22살에 자신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이후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오직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70여 년 전인데도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수만 명씩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인도했던 야외집회만도 무려 1만 8천 번에 이릅니다.
그런 그의 열정과 열심이 있었기에 산업혁명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영국사회에 변화와 질서가 세워지게 되었고, 불신과 회의,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던 영국에 신앙회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열정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열심을 가지고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자세히 보면 위대한 일이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고수, 달인, 또는 장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갖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해서 경지에 오른 사람입니다. 거기에 인생을 걸고 삽니다. 세상이 볼 때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10장을 들어 왔습니다. 이 10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얼마나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여기 보면 바울은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루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거룩한 소원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원한 것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롬 9: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동족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땅에 다니며 예수를 전합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이 옵니다. 그래도 멈추지를 않습니다.
한번은 재판을 받는데 당시 총독이었던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며 바울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과 변화를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바울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베스도의 말대로 사도 바울은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었습니다. 헬라의 학문이며, 로마의 법률이며, 유대의 전통이며 두루두루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출신성분도 대단했습니다. 바울의 그만한 경력과 배경이면 교육계로 진출했더라면 국립대학의 총장 정도는 했을 것입니다. 사업계로 진출했더라면 대그룹의 총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치계로 진출했더라면 지방 총독은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건만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자원하여 죄인이 되어 재판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사람들의 모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런 수치와 모멸에 가까운 자리에서도 이런 당당함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원래 바울이 이런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초대 교회가 핍박받을 때 교회를 잔멸할 만큼 앞장을 섰던 자입니다. 빌3:6절에 보면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도 앞장섰고,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자원해서 멀리 다메섹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교회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그게 모두 하나님을 위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는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 열심하던 바울에게 충격이 왔습니다. 자기의 혈육이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지난 날 자기가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를 거부하고 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그러므로 2절에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꼭 누구를 보는 것 같습니까? 자신의 잘못된 열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일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그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까? 소위 메시야를 기다리는 열심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잘못된 열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 놓는 잘못된 열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또 우리의 신앙에 분명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오늘 우리의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적인 열심이 우리의 의처럼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해 줍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씀합니다. 여기 4절을 보세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율법의 마침이라는 것은 율법의 종결자라는 뜻입니다.
종결자라는 단어를 요즘 많이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서 음악의 종결자라는 것은 음악을 그 사람만큼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미의 종결자라고 하면 그 사람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결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히 100% 다 지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완전히 의로운 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은 율법의 종결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행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서 대신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의를 옷처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마치 냄새나는 걸레를 걸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냄새나는 걸레를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면 당연히 쫓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하는 이 로마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명처럼 받들던 율법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한 의가 누구입니까? 롬3: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예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느 누구든 다 차별이 없이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여전히 죄 속에 있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3: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죄인인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복음입니다. 나는 죄인이고 죄인인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았음을 믿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봉사를 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헌금을 낸다 하더라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한다 하더라도 그게 나의 공치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왜요? 내가 한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 사건에 비하며 너무나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한 그 많은 헌신, 헌금, 기도, 열심,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이 되고 말았습니까? 본문 2절에서 말씀해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잘못된 지식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열심이 자기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는 자기들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다했으나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열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남을 정죄하거나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열심히 축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관계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착한 일, 좋은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믿으십시오. ‘하나님, 제게는 제 인생을 행복하고 멋지게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 파산선고를 하십시오. ‘주님, 이 세상도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관계의 축복이 옵니다. 내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아파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넘어질 때 괴로워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잘 될 때는 기뻐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관계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아 주관해 주십시오. 다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의와 희락과 화평이 임할 때 내 마음과 가정,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이 있음을 주님 제가 인정합니다. 주님,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주의 뜻 안에서 내가 살기를 원합니다.’ 라는 고백을 드릴 때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 은혜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예수께서 그 모든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희생의 제물이 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2월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세상은 거절 했지만, 우리는 생명의 빛을 마신 자들입니다. 그 주님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언약의 메시야를 기다리던 그ㅡ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열심을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주 잔인하게 군중들을 선동하고 책동해서 골고다에 십자가에 처형을 합니다. 이는 아주 잘못 된 열심입니다. 이제 그 은혜 앞에 섰다면, 그 진리 앞에 섰다면, 내가 한 해 동안 우리의 신앙의 결산은 어떻습니까? ?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점에서 신앙의 결산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표어대로 ‘세상을 향한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로 내 삶이 여기에 집중 되었는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도 우리 교회는 이 땅에 버려진 어려운 이웃들에게, 여러분 가슴에 담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저들에게 나누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