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 기쁜 소식 롬10:14-21. 2019. 12/15. 주일 설교
올해도 우리나라에 10대 뉴스가 발표되겠습니다만, 아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과 북한의 정상 회담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 회담은 정말 우리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베트남 하노이에서 2월 달에 열렸습니다. 이때 미 대통령이 머물던 숙소가 회담일자가 다가 왔는데도 어디에서 양국 간의 대표들이 묵을 숙소가 비밀에 붙여졌고, 양측 경계가 얼마나 철저한지 세기의 관심사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트럼프가 묵은 호텔 하루 숙박비가 1000만원을 홋가 하는 방이 55개나 되고 또 보안 유지를 위해 그 호텔을 하루만 임대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첫날밤을 보내신 숙소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4년, 기껏해야 8년짜리 대통령도 그런 호화스런 곳에서 묵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과연 어디에 묵으셨습니까? 눅2:6-7절을 보면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세요. 세상이 버린 곳,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마구간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흔한 여관방도 구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마구간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입니다.
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왜 하필이면 인간의 모습으로 와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마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받아야할 그 죄의 값을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성탄을 맞이하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삼위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 그 아들을 포기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기 위해서 자기생명을 대신 바친 것입니다. 이것만큼 큰 희생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그분은 이 세상에서 오셔서 세상 끝 날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안에 함께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치루신 댓가는 값비싼 희생이셨습니다.
희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희생을 해 주시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로 기도해 주었기에 내 심령이 열려서 예수님을 구주의 주님으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는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않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바울을 보세요.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본문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부흥하는 초대 교회를 아수라장을 만든 사울이 나옵니다. 행8:1-3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 그가 구원받고 사도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좌우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자식에게 교우들에게 남겨 줄 좌우명이 있나요? 없다면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5:9-10절에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무슨 염치로 복음을 전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시고 그를 사도로 세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영접한 후에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 14-15을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 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처럼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어떻게 복음의 책임을 가져야 할까? 하는 진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이 쉽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면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좋은 소식,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은 이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알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도 바빠졌습니다. 한 밤중에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수많은 천군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탄생을 전합니다. 눅2:13-14절에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어찌 그뿐입니까?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도 전합니다. 마1:20-21절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성전에 머물던 안나와 시므온에게도 동방박사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가지 않는다면 누가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습니까?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비단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 삶의 장에서 만나는 복음 없이, 주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녀들입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이 쉽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면 믿는 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17절입니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Ⅱ. 그러나 - 여기 16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이 가장 잘 믿어야 할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저들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불순종한다고 거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롬 10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얼마나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여기 보면 바울은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소원한 것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롬 9: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동족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해 사는 바울의 유일한 관심이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 전하기를 힘쓰노라”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은 이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망년회를 하고 가족끼리 여행을 하는 날이 아닙니다. 올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했습니까? 성탄은 전도의 계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밖에 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Ⅲ. 성탄의 기쁜 소식을 대하는 태도 - 순종입니다.
여기 보세요. 2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며 수도 없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듭 거듭 손을 내 밀며 “내 손을 붙잡고 가야 한다. 순종하여야 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삽니다. 묻습니다. 정말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주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 오셨습니까? 그 은혜 앞에 우리 다시 힘을 냅시다.
참 하루하루 산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 넘어지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여기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는 한번 당신의 자녀 삼으신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십시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괞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친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들은 모두가 다 행복합니다. 일에 미친 사람은 일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공부에 미친 사람은 공부가 즐겁습니다. 예수님께 미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하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합니다. 그리고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사랑을 알고 또 그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저는 이번 수요일에 서울 경찰청에 가서 예배를 인도합니다. 거기엔 우리 김종훈 장로님이 인도하신 윤경 자매님이 근무를 합니다. 연락이 돼서 수요 예배에 침석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친구 이박사인 이상희 장로가 전도하기를 원하는 임기준 선생에게도 연락을 했습니다. 반드시 성탄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전하십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그리고 가슴이 시리도록 나에게 은혜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 - 정말 사랑의 빚을 많이졌습니다. 이 성탄의 기쁨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다 함께 읽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