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카운트다운 시39:4-7. 2019. 12/29. 주일 설교
격동의 2019년도가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2019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의 신앙을 결산 해 보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면 거둘 날이 있고, 사업도 때가 되면 결산할 날이 있습니다. 인생도 때가 되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있고 우리 신앙도 마지막 주일에 결산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분수령에 서서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할 것이고, 또 생각하는 것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①. 특별히 여러분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새해를 기다리고 묵은 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②. 또한 나이로 보아서 어떤 연령에 지금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한 해를 보내고 맞는 감정이 틀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연령층에 속했든지 간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받을 수 있는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보는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특별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인데 이 말씀이 기록 될 때 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나 60대 정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절 13절에 보면 그가 지금 병상에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없어지기 전에, 내가 죽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 성군입니다. 그런데 의롭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 치고 주변에 정적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적들은 다윗이 다시 소생할지, 소생하지 못할지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병색이 깊어지자 은근히 좋아했습니다. 하나같이 원수들은 건강하고 형통하여 다윗을 비웃으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이는 들고 몸은 병들어 대응할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향해 저주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입을 꼭 다물고 참았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내가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지?' 하고 자기도 모르게 화가 목에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그는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부를 다시 한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부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마음을 줄 것도 못 되고, 내가 의지할 것도 못 되.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할 자입니다. 하나님, 나를 받으시옵소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고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연말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다윗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Ⅰ. 한 마디로 인생무상‘ 입니다. 5절을 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윗이 한 60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지금 앞으로 남은 인생이 몇 년이나 될까 손가락을 세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도대체 내가 한 생을 살았다고 하는 데 그것이 고작 한 뼘에 불과하구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길이를 잴 때 기본 단위는 한 뼘이었습니다. 다윗이 병상에서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아무것도 아니구나!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면서 굉장한 인생을 산 것 같은데, 나의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별 것 아니구나. 한 뼘 인 인생,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똑같겠구나.' 다윗은 자신을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 가운데서 5절 중간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줍니다.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 이니이다." 여기서 허사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로 ‘헤벨’(lb,h)인데, ‘입김’ 혹은 ‘호흡’(breath)이란 뜻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것을 잘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보세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덧없습니까?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준화가 이뤄집니다. 50대가 되면 미모의 평준화가 이뤄집니다. 60대가 되면 성의 평준화가 됩니다. 70대가 되면 재산의 평준화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실존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원한 가치가 없는 것에 메여서 아둥바둥 사는 인생이 얼마나 가련합니까? 하나라도 더 세상의 것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인생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나방이 불속으로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다윗에게도 고난의 파도가 자신을 거세게 덮어오는 현실 앞에서 두 가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한해를 정리하는 우리들에게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첫째가 4절에 다윗이 고백한 “나의 종말과 연한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언제 끝날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해달라는 겁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인생을 마칠 때를 잊지 말고 기억하게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는 이어서 12절(중) 보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 ...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인생은 떠도는 나그네라는 겁니다. 조상들만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든 인생도 그렇다는 겁니다. 다윗은 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게 해 달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일장춘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몸이 나른해서 점심이라도 먹고 나면 식곤증이 자신도 몰래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살짝 조는데 그 잠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 짧은 시간에도 깊은 꿈을 꾸지 않습니까? 꿈에서는 일확천금을 얻어 커다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수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 깨고 나면 한바탕 허망한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봄날에 꾸는 꿈같은 인생이 일장춘몽입니다. 인생의 허무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나무들을 잎이 다 떨어집니다. 얼마나 춥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나무들은 백년을 살고 이백 년을 살고 몇백 년을 사는 나무들도 있지만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하지만 마치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우리들은 금방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입니까?
둘째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 여기 ‘그림자’는 원문에 보면, 히브리어로 ‘ 첼렘’(!l,x)인데, ‘허상’ ‘환상’(phantom) 이란 뜻입니다. 무언가 하면서 동분서주하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재물을 쌓아놓고도 못 쓰고 간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돈은 내가 죽어라 벌어서 모아 놓았는데 정작 그 재물의 주인은 누가 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지난 번 전 세계를 고통으로 빠뜨렸던 금융의 위기는 당시 어느 누구도 예측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세계 최고의 돈버는 전문가들이 모인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가’에 가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들, 돈을 굴릴 줄 아는 경영의 천재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금융 위기 앞에는 속수 무책이 아닙니까?
당시 미국 금융의 최대 회사 중에 하나인 ‘리먼 부러더스’의 붕괴를 시작으로 한 순간에 4000조 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금년 예산이 500조이니까 이 돈이 얼마나 큰 액수인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똑똑해도 돈 관리를 잘해도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 하나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모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는 사람은 그런 은혜를 받습니다. 재물은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펴기 위해서는 재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일을 하면서 많이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돈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재물과 관련된 성경 구절이 2,300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비유 38개 중 16개가 재물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그만큼 돈, 재물,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이 벌길 원합니다. 많이 모으길 원합니다. 그러나 버는 것 못지않게 잘 이 돈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교부 오리겐이 한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땅에 재물을 취하여서 하늘의 통화로 바꾸는 환전상과 같다." 우리가 공항에 내려서 돈을 쓰려면, 가지고 간 돈을 그 나라의 화폐로 바꿉니다. 소위 환전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재물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그 재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 돈을 다 쓸 생각입니까?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잠깐 있다가 가는 세상에서 얻은 재물은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보화가 되어 광채가 나는 보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사회에 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발견하면 그것을 위해서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만 쓰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값없는 세상의 재물이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통용되는 영원한 나라의 화폐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면 우리의 물질도 이렇게 아름답고 가치 있게 쓸 수가 있습니다.
Ⅱ.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이제 다윗은 고백합니다. 7절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베들레헴의 작은 농가에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에는 목동으로 지낸 무명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무찌르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이로 인해 사울 왕의 미움을 사서 뭐, 거의 20여 년이 넘는 세월을 광야로 쫓겨 다니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용맹스러운 왕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정말 인생을 살면서 가장 처참한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며 산 경험,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권력을 누려본 인생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는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여기 ‘바란다’라는 말은 ‘소원한다‘’ 희망을 가진다‘ ’갈급한 마음으로 갈망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한때 그 역시 세상의 것에 눈을 돌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시선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여기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 고백은 우리의 삶의 추, 삶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이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내 삶의 무게중심을 어디에다 두셨습니까? 소망은 우리는 살리고 죽이는 힘입니다. 사람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소망입니다. 히브리어로 “소망”을 “티크바”라고 합니다. 이 말은 “노끈”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끈을 꼬다”의 “토헬레트”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 말하고도 비슷합니다. 끈은 많이 꼬아야 단단합니다. 여러 개의 실이 꼬아져서 결합된 것이 노끈입니다. 소망은 노끈을 붙잡는 것입니다. 사40: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할 때 “앙망하다, 바라보다”가 “토헬레트”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여호와를 노끈처럼 붙잡는 것입니다. 희망은 붙잡는 것입니다. 희망은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토헬레트”, 붙잡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에게도 소망은 항상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붙잡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롬4: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과 축복권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자동적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땅 한 평이 없었고 100세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약속을 주어졌지만 약속은 시간이 지난다고 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롬4: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있는 환경중에 바라는 것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토헬레트”. 그는 환경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소망은, 붙잡을 때 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을 붙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안 믿는 사람은 상황을 붙잡고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고 그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희망은 “반드시”를 붙잡는 믿음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이 “반드시”를 붙잡았습니다.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했습니다. “내년 이 맘때 반드시 네게로 오리라”. 사라는 이 약속을 믿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반드시”를 믿고 광야를 건넜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우리가 붙들 “반드시”가 있습니다. 히6:14절에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아멘. 한 해가 지나가지만 희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직 희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달력에서 2019년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시간에 소망은 계속됩니다. 자 남은 시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묻습니다. 오늘 나오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어떻습니까? 한해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나요?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가정이 파경에 이르고 물질적으로 정말 어려웠나요?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서 죽음을 생각하셨나요? 얼마나 두려우셨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하던 제목, 아직도 응답이 못 받았나요?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이유없이 비난받았나요?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이제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우리 다시 일어섭시다. 오늘 다윗은 외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앞날에 밝은 태양 빛이 보이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는 빛이 되십니다. 예수가 계신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답답한 현실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승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와 함께 가장 가치 있는 삶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