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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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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희망입니다(요일 4:7-11) 2010. 1. 3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2-02 | 조회: 2225
좀 오래 된 영화지만 1912년 1,5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북대서양에 가라앉았던 초호화 여객선의 비극적인 침몰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맺어진 두 남녀의 숨겨진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1990년대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탐사 작업을 벌이던 보물 사냥꾼과 과학자들은 궤짝 속에서 목걸이만 걸치고 있는 누드 그림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뉴스로 보고 알게 된 타이타닉의 생존자 101세 되는 로즈 할머니는 그 그림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80여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여인은 무려 80년 동안, 단 4일간 사랑을 나누었던 잭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오고 있었습니다. 빙산과의 충돌로 배가 침몰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 잭은 로즈를 부서진 배의 파편 조각 위에 올려줍니다. 그 잠시 동안 잭은 로즈에게 반드시 살아남을 것을 부탁하고 차디찬 죽음의 바다 속으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잭과의 그 마지막 대화를 회상하면서 로즈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내 생명만 구해준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 안에,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로즈로 하여금 17살에 만나 단 4일 동안의 나눈 사랑을 101살이 될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직도 그는 살아있다’고 이야기 하게 했을까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떠올리면 여전히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어느 때 보다도 우리는 사랑을 많이 말합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쏟아져 나옵니다. 사랑을 노래한 문학작품도, 대중가요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외로움을 느낄까요?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감동을 갖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는 교회 속에서도 우리가 찾는 사랑은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쩌다 ‘야,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구나.’를 깨닫고 잡으려 하면, 오히려 그 사랑은 상처가 되어서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요인으로 남기도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오늘 우리는 아닐까요? 그런 우리들을 향해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 외침이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당신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그런 사랑! 시간이 지나도 상관없이 가슴속에 남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냉랭하고 험한 세상 살아갈 때에도 따스함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사랑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실망 가운데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이 크게 외칩니다. ‘진정한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랑 찾고자 자신이 직접 몸부림쳤기에 그의 외침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를 변화시켜 사랑의 사도로 만든 그 사랑, 거치고 힘든 세상을 힘 있고 용기 있게 살아가게 하는 그 사랑을 발견했노라고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다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이 상처와 이별과 아픔으로 끝나는 사랑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랑은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생명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머물면서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입니다. 10절 말씀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여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그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루고 얻어진 것이 바로 구원 받은 여러분과 저가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셨습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4살이 채 안된 어린 아이를 야단치는 엄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들은 그 어머니의 말 “난 너하고 다니면 굉장히 창피해, 왜 밖에만 나오면 엄마말도 듣지 않고 네 맘대로 하려고 그러니? 너하고 있으면 너무나 창피해!”가 제 가슴속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 앞에 제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실패도 자주 하고, 하라고 명하신 일을 거역하기도 잘 합니다. 심지어 사탄이 보기에 죄를 행하고 나아가서 사람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사탄이 주님께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안두익이라는 저 친구, 저렇게 퍼주어도 퍼주어도 소용없는데 왜 사랑하시지요? 죄 짓고 회개했으면 그만해야지 늘 같은 생활 반복하는 어리석은 저 인간을 왜 그토록 사랑하죠? 하나님 실수하셨어요. 저 보세요! 오늘도 하나님 것보다는 자기 것 찾는 저 비뚤어진 마음 좀 보세요. 투자가치가 있나요? 하나님 실수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두익! 난 너를 보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 내가 너를 얼마큼 사랑해야 네가 정신을 차리니? 내 아들까지 주었는데 너는 아직도 그 옛날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니? 옛날 회개했던 것을 오늘 또 회개해야 하는 네가 나는 정말 역겹고 지겨워! 너를 보면 정말 천사들과 마귀 앞에서 부끄러워 죽겠어!”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난 네가 죄를 지을 때 슬퍼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네가 믿음 안에서 살 때 기뻐하면서 너를 사랑해! 난 한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귀찮게 여긴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무시한 적이 없고, 한번도 너를 모른 척 한 적이 없단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 비록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나를 나 보다 더 잘 아시는 그분이, 나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신바 되신 그분이, 나의 작은 신음 마져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찾는 그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표현하시고 나타내신 십자가,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여기 7절을 보십시오 7절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내려가서 11절도 함께 읽어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하도다’ 이 표현이 ‘We ought love’ 이것은 must라는 조동사보다도 더 강력한 뜻이에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의무입니다. 사랑은 의무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흐르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듯이 한번 마음이 닫혀 지면 정말 사랑하기가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들은 미워한다거나 원수를 맺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화해를 모색해 보고 별별 생각을 다 하지만, 쉽게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란 책 앞부분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햇살 뜨거운 어느 여름날 오후, 개구리 세 마리가 나뭇잎에 올라탄 채 유유히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강 중간쯤 이르렀을 때 그 중 한 마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너무 더워, 난 물속으로 뛰어들 거야!” 다른 개구리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 이제 나뭇잎에는 몇 마리의 개구리가 남았을까? “두 마리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틀렸습니다. 나뭇잎 위에는 여전히 개구리 세 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뛰어 들겠다는 결심과 정말 결단하며 뛰어드는 실천은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녀석이 정말 물속으로 뛰어들지, 또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다시 앉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늘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뛰어들겠노라 큰소리만 치는 개구리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다이어트 계획을 빈틈없이 세웠지만 체중계의 눈금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여전히 운동은커녕 넥타이도 매지 못한 채 허겁지겁 출근하고 있지 않습니까? 날마다 새벽을 깨우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건만 혹여 주일 아침조차 급하게 교회로 향하는 일상은 아닙니까? 이젠 사랑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주져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다. 끊임없이 결심만 하는 삶이 결심조차 하지 않는 삶보다는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합니다. 고작 30㎝도 안 되는 이 거리를 평생 오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심과 각오만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지런히 손과 발을 움직이고 주신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사랑을 주셨다면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어떻게 갚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필요한 자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불우한 자, 사랑이 갈급한 자에게 주는 것을 곧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마25:31-46에 보면 양의 편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의인들이 당황하면서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라고 하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돌본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빚을 갚는 사람은 공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빨리 갚지 못하고 이제 갚는 것을 미안해 할 뿐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이 그래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누가복음 6장 35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사랑은 모욕하는 자는 기도해 주고 저주하는 자는 축복해주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극진히 선대해 주고 원수도 사랑하고 대접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행복한 거예요. 어떤 장애물도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미워하면 미움에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미움의 열매는 큰 사고와 불행까지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허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벧전4:8절에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살면 상대의 허물과 허다한 죄가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내 허물이 크고 내 허물이 많을 뿐 누구의 허물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사랑하게 되고 누구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최근에 주목받는 CEO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동통신회사 KT의 조서환 부사장입니다 그 분은 23세의 나이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런데 임관한 해에 수류탄 사고로 오른손을 잃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수류탄을 다시 집어서 던지면서, 최대로 팔을 뒤로 뻗는 순간 터져서 앞은 다 괜찮고, 뒤에는 철모를 뚫고 파편이 머리에 몇 개 박히고, 등허리에 파편이 박히면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뇌가 깡통 찌그러지듯이 줄어드는 아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너무 심한 고통에 기절했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당시에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손을 잃은 처지라 여자 친구에게 쉽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연락을 했더니, 여자 친구가 병원에 왔습니다. 그의 모습을 본 여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자 친구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30분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나.... 사랑해?” 여자 친구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고 합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는 나이는 어렸지만 조숙한 면이 있었습니다. 병원 근처로 이사를 와서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간호하는 일에 전념을 했습니다. 비록 한쪽 손을 잃었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무척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기의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 친구 아버지가 병원에 나타나 딸을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딸이 싫다고 하자, 아버지는 “너, 저놈 아내 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양자택일하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잖아요. 만약 아버지가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면, 어머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한쪽 팔 없는 남자와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 재혼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는 당신의 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사랑했어요’하고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세요?” 이 말에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조서환 씨의 마음속에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합니다. ‘내 평생 이 여자 하나만은 행복하게 해 주겠다!’ 그 때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아주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목표 설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내가 이 남은 목숨 다 바쳐서라도 당신한테 고생 안 시키겠다.' 그 후에 그는 서울대 영문과에 가기로 결심하고 병실에서 편입시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어 문장을 세 번 정도 읽기만 해도 외워졌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니까, 쉽게 암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파워가 나옵니다. 사랑하면 어떤 수모도 이길 수 있습니다. 조서환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하려고 해도 장애인이라고 취업도 쉽지 않았습니다. 낙심될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요? 여자 친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애경의 신입사원 최종 면접장에 한 지원생이 흥분된 표정으로 들어왔지만, 면접 중간에 오른 손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동 탈락됐습니다. 억울함을 못 이긴 그는 면접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높이지 않은 채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었습니다. “저는 깡패 노릇을 하거나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다친 것이 아닙니다. 내 민족 내 겨레를 위해 자의든 타의든 군에 갔고, 또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사 모집공고에는 분명히 국가유공자 우대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써놓고 지키셨습니까?” 결국 이 지원생의 남다른 배짱을 눈여겨본 장영신 애경회장은 그를 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경의 ‘하나로 샴푸’를 기획할 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경쟁업체 두 군데에서 이미 선점했기 때문에 시장성이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장영신 회장은 11번 퇴짜를 놨습니다. 그러나 조서환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회장에게 ‘하나로 샴푸가 망하면 분양 받은 목동 아파트라도 팔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회장에게 12번 보고한 끝에 승낙을 받아내 생산했는데, 그것이 바로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가 하나로 된 ‘하나로 샴푸’라는 제품입니다. 또 20개의 치아를 80세까지 보존해준다는 의미에서 ‘2080’ 이라는 치약을 기획해서 대 히트를 치게 했습니다. 최근에는 3세대 이동통신 브랜드인 ‘show'의 마케팅을 담당했는데, 그 상품은 WCDMA(제 3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팔이 조서환에서 가장 주목 받는 CEO 조서환으로 변화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로 하여금 견디게 했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위에서 종종 자존심이 상해서 못해먹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존심도 내려놓게 만듭니다. 사랑하면 7년도 수일처럼 기다리게 만듭니다. 사랑하면 포기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런데요, 이 사랑을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사랑을 빚진 자는 겸손합니다. 조서환씨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찌 아내 앞에서 교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와 결혼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 누구나 겸손해집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사랑을 아십니까?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를 부인합니다. 죽음을 향해 나가는 일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만이 희망입니다. 참, 우리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누구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감히 죄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자리에 우리가 나와 이렇게 예배자로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신 그 하나님 앞에, 도대체 내가 누구길래 이런 대접과 은혜를 누리고 삽니까? 나의 모습, 내가 나를 보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나를 위해 주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목숨을 송두리째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담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깨뜨렸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맹렬하게 집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깨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깨질 때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스며들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메마르고 거친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깨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지속적인 능력이 임하지 못합니까? 맞아서 깨지는 것 외에는 깨지는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세요!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젠 사랑합시다. 사랑만이 희망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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