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영광, 영광 롬11:33-36. 1/26. 주일 설교 최종
오늘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첫 주일을 맞아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설날이 있어서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 아닙니까? 이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설날에 대해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날의 설이란 의미는 '낯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설이란 어떻게 보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하며 지난 묵은해에 우리가 못다한 것들을 돌아보며 새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이 설은 우리에게 매우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력으로 새해를 맞는 특히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영적인 생활, 그리고 가족 간의 관계, 더 나아가 명절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는 로마서 11장을 마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33-36절까지를 송영이라고 합니다. ‘송영’이란 말은 영어로 doxology입니다. 헬라어의 영광을 의미하는 doxa와 말씀을 의미하는 logos가 합쳐친 합성어로 영광에 관한 말씀 혹은 영광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광에 대한 노래란 의미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영광’(榮光)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배우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인사말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영광을 팬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경우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사람이 과분한 자리에 오르게 됐을 때 “가문의 영광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영광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 사전을 보면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고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남다른 업적을 세웠거나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할 만한 공을 세워서 그 이름이 빛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 영광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쓰이는 영광이라는 말은 겉으로 볼 때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카보드’(כבד)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무겁다’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탁월성과 위대함’을 말합니다. 그 탁월성과 위대함이 클수록 드러나는 영광이 큽니다. 다음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 ‘독사’(δόζα)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빛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탁월성과 위대함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들이 강열하게 드러날수록 영광이 큽니다. 결국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영광이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탁월함과 위대함을 말하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때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15:4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우선 이 말씀은 하늘에 속한 것에게도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것에도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 즉 영적인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영광이 있고, 땅에 속한 것 즉 인간과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안에는 탁월함과 위대함이 있고, 그것들이 드러나게 될 때 그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그런데 고전 15:4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늘의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천체들의 밝기가 서로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신 영광이 저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이 있고, 역사를 관통하며 그 빛을 발하는 위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영웅들 가운데도 저마다 그 영광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영광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밤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모든 천체들도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모두 다 자취를 감춥니다. 여전히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지만, 그 모든 빛은 태양 빛의 그늘 아래로 묻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 모든 피조물이 나타내는 영광은 존재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의 구원에 대해 1-11장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감격을 합니다. 그러므로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여기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부요함이 깊다고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이 성육신을 누가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할 수 있으며 이 승천하는 신비한 일을 어떻게 어떤 존재가 계획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의 무한 광대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대비하시고 모든 것에 완벽하게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34-35절에서 세 가지 부정적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들을 던집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아무도 주의 마음을 다 알 자는 없고, 아무도 하나님께 어떤 충고도 드릴 수 없으며, 아무도 주께 먼저 무언가를 드려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식으로 만들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가졌고 이루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요, 하나님께 유익이 될만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 이유를 바울 사도는 이어서 찬송의 형태로 답변합니다.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하나님이 만물의 궁극적, 최상의 목적이십니다.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렇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무에서 시작되었고, 모든 만물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 감격을 담아 바울은 영광이란 단어로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카보드’(כבד)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무겁다’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탁월성과 위대함’을 말합니다. 그 탁월성과 위대함이 클수록 드러나는 영광이 큽니다. 다음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 ‘독사’(δόζα)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빛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란 누군가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탁월성과 위대함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들이 강열하게 드러날수록 영광이 큽니다. 오늘 이 아침에 나온 우리 역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 새해부터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Ⅰ.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이 영광을 봅니까? 사도 요한은 요 1:1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뒤에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늘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면서 은혜와 진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더 이상 주의 영광을 보고도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주의 영광을 본 자들은 더 큰 은혜 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영광 보기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이제부터는 주의 영광을 구하며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주의 영광을 자기 눈으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행 22:6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 22:11을 보면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강열한 주의 영광의 빛을 보았기 때문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서 회복되고 다시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을 혹독하게 핍박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영광을 본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비록 예수 때문에 핍박과 온갖 멸시 천대를 받았지만, 그는 롬8: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 이 사실을 다 담아낼 수가 없어서 “깊도다” 하며 감탄사를 터뜨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을 본 인생들은
Ⅱ. 주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입니다.
33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미국에서 최고의 전문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신경외과 주임의사가 된 흑인이 있었습니다. 벤 카슨입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두 아이가 머리나 몸이 붙은 채 태어나는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수술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뒤통수가 맞붙은 샴쌍둥이를 무려 22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손’ ‘기적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선물 받은 손』이라는 자서전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늘의 내가 된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손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그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이든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그의 걸작인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태극기를 걸고 우리에게 ‘석별의 정’이라고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애국가를 작곡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애국가를 완성했습니다. 훗날 애국가가 불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의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세 명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에서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한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위대한 어떤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작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그렇습니다. 우리가 벤 카슨처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하이든처럼 웅장한 곡을 만들지 못했어도, 또 안익태처럼 한 나라의 국가를 작곡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먹고 마시는 작고 사소한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이 시대에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제 구력으로 새해를 주셨다는 것은 다시 한번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습니까? 비록 작고 부족해도 내게 주신 주님의 은혜를 따라 순종하며 나아갈 때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고, 부패한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소금 같은 인생이 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영광 가운데 이 한해 우리 동성교회와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영광이 머무는 축복의 한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