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 롬12:1. 2020. 2/2
2020년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 벌써 2월 첫주를 맞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담임목사로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께 한 가지 축원을 하고 싶습니다. 올 한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공식적으로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 횟수가 150번을 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100번이 안 되시는 분은 비정상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목장에 참석해서 드리는 예배까지 계산하면 1년에 150번 이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셈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1년에 150번 이상 예배드린다고 하니까 마치 1년 내내 예배만 드리다가 끝나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어떤 분이 우리 인생을 80년으로 놓고 재미있는 계산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80년으로 볼 때 25년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23년은 잠자면서 보내고, 7년은 먹고 마시면서 보내고, 8년은 쉬면서 즐기면서 보내고, 3년은 남 기다리다가 보내고, 또 1년은 전화통 붙들고 보낸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데 보내는 시간을 1년 반 정도로 잡았습니다. 80년 중에서 1년 반이라고 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그의 계산에 따르면,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적어도 5분 이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해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적어도 5분 이상 하루를 잘 보내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주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에 나와 적어도 3시간 정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80년 중에 1년 반이나마 예배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어떻습니까? 조금만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조차 못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리고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1 주일에 3 시간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 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면 우리는 80 평생 동안 1년 반조차 제대로 예배 드리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아니 천국에 잘 들어갈 수나 있을 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년 반을 채우려고 해도 예배를 위해 지극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는 귀찮은 의무라기 보다 구원받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보람되고 감격스러운 특권입니다. 성도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어떤 일보다도 앞세우고 또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로마서를 보는데 1-16장까지 나오는데 크게 두 단원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유명인들이 무너지는 미투도 사람들이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이 죄는 우리 인간의 행복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몰고 가는 무서운 것입니다. 롬5:12절에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생에게 다가 오신 예수는
우리 인생에게 참된 소식을 줍니다. 롬5:8-10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간인데 나를 위해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르므로 죄로 막힌 담을 헐어내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이제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프러포즈인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엔 조건이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기만하면 어느 누구 예외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 교리를 11장까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가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면 이제 새롭게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12장부터 전개가 되는데 1절에 예배를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이야기 합니다. 자 함께 읽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쉽게 표현하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예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들으셨지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자기 백성을 만나십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얻습니다. 그 능력을 얻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성도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여기 ①. “거룩한”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늘 “구별”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는 구별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거룩하지 않은 것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옛날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드릴 때, “흠 없는”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찾고 찾아서 드리는 예물이 흠 없는 예물입니다.
②. ‘산제사’는 바로 몸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구약의 예배는 짐승을 잡아 드린 희생 제사였습니다. 양이나 소를 드릴 때 반드시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반드시 양이나 소,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입구에 제사장이 서서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은 아예 입장도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는 희생제사는 양이나 소로 하되 반드시 1년된 수컷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암컷은 새끼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보호했던 것 같지만 1년된 수컷이 동물로는 최상의 상태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좋은 것을 드린 것입니다. 마지막은 제물을 드리되 반드시 살아 있는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죽은 것을 드리거나 죽여서 드린 것이 아니라 산 것을 드리고 다음에 죽였습니다.
이것이 롬12:1절의 “산제사”입니다. 이제 나의 삶을 구별되게 드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왜 나에게 응답이 없으며 삶의 변화가 없는지를 한탄하기 전에 구별된 예배를 드리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호6: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에 보면 최초로 예배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같은 예배인데도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고 아벨의 예배만 받았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가인의 마음에 죄가 분노의 감정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인이 안색이 변하고 마음에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4:6-7절에 보면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죄가 가인을 노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조심하라고,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는 끔직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왜 예배자로 주 앞에 나왔는데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납니까? 창4:4-5절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아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기 “아벨과 그의 제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드리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물보다 우리 자신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벨의 예배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제물을 받기 전에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예배도 문제는 제물이 아닙니다. 제물보다 먼저 받지 않은 것은 가인 자신입니다.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근본적인 문제는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예배자의 문제입니다. 실컿 예배는 드렸으나 나를 드리지 못한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배의 타락은 하루아침에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의 타락은 종교적이고 겉치레 같은 예배에 있습니다.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예배의 중심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이 있습니까?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을 분석하는 사람중에는 한국교회 예배의 타락을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의 가장 큰 타락은 예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어땠어?” “응, 은혜 많이 받았어.” “아니, 별로였어. 찬양도 지루하고 설교도 그렇고 그랬어”. 하나님께 드린 예배가 별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어떻게 그렇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목회자는 신자들의 입맛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인터테인먼트 예배를 추구하고 신자들은 자기 몸을 드리기보다 예배를 통해 오로지 자기만족이나 위로만 받고 있습니다. 조금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치는 설교”, “표적 설교”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배를 찾아 주일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는 교회 방랑객이 10만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배보러 다니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은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예배가 예배 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nbs p;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을 사라지면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나 감격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찬송하고픈 열망도 없고, 복음을 전하고픈 감동도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맨송맨송합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주일이 다가오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교회에 가긴 가야 하겠는데,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억지로 교회당에 나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영과 우리의 신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감동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예배 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 6장을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가 사해지는 체험을 합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듣습니다. 이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 소명사건 이후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좇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신약에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쓰임 받았던 베드로에게 다가오신 예수님 앞에 예배자로서 무릎을 꿇고 고백합니다. 눅5:8절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는 만선의 즐거움보다 이 만선을 이루게 하신 주님의 그 엄청난 역사 앞에 단 한마디 고백이 있을 뿐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일상의 현장인 바다라는 일터에서 자신에게 다가오신 그 예수를 만날 때, 그 예배 가운데 그는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스테반을 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나와 돌로 맞아 죽는 고난을 받습니다. 그 때 그의 눈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의 현장에서 그는 예배자로 섰습니다. 그가 돌멩이가 날아오는 현장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음을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있음을 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예배의 시작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예배자로 사는 것이야말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주일 예배자가 아니라 매일 예배자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순간마다 하나님의 의식해야 합니다. 에녹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와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그대로 들림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평범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담아 예배를 드릴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담아 예배 드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귀에 은은하게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바로 드립시다. 하나님 앞에 바로 나갑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빈 마음을 가지고 섭시다. 모든 것을 주께 드리는 자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세상의 수고와 슬픔으로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시고 싸매어 주시고 하루하루를 힘있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금년 2020 년도 한 해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이 회복됩니다. 생활이 회복됩니다. 인생이 회복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 이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드리는 진정한 예배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