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롬12:2 2020. 2/9
올해 우한지역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누적 중국에만 사망자는 630명을 넘고 확진자 또한 3만명을 초과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망자는 없지만, 확진자가 23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요즘 병원 심방을 하면 정말 심각합니다. 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얼게 만들고 외국의 관광객 마져 오지 않는 어마어마한 재난이 되 버렸습니다.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사람 만나는 것까지도 두려움이 될 정도로 우리 사회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 세균 하나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교회도 감염 우려 때문에 출석을 꺼리는 분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Ⅰ. 오늘의 세대
며칠 전에 서점에 들렸다가 우연히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유발 하라리’가 쓴 책 가운데 『호모데우스』 (Homo Deus)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모’(Homo)는 인간이란 말이고, ‘데우스’(Deus)는 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이 두 개의 단어를 합성하여 현세대의 인간을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 ‘하나님이 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이 책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유발 하라리 교수는 지금까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기아(굶주림)와 전염병과 전쟁(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적은 기아(굶주림)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1692년과 1694년 사이에 두 해 동안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당시 인구의 15%인 28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이듬해인 1695년에는 에스토니아에 기근이 닥쳐 인구의 5분의 1이 죽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1696년에는 핀란드에서 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일 죽었고, 1695년과 1698년 사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어느 곳에서는 거주자의 20%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비만으로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2010년에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100만 명 정도였는데, 같은 해에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그 3배에 달하는 30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인류의 두 번째 적은 전염병입니다. 지금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긴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염병은 1330년대에 흑사병이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휩쓸었는데, 그 전염병으로 인해 7,500만 명에서 약 2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유라시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수입니다. 잉글랜드에서는 흑사병으로 열 명 중 네 명이 죽어 흑사병 이전에 인구가 370만 명이었는데 흑사병 이후에 인구가 22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10만 명의 시민 가운데 그 절반인 5만 명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의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고, 21세기 들어와서도 몇 년마다 한 번씩 사스, 조류독감, 메르스 신종플루, 에볼라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등 많은 전염병이 세계적인 확산 조짐을 보였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는 수천 명에 불과합니다. 이제 전염병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란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인류의 세 번째 적은 전쟁입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사망 원인의 약 15%가 전쟁과 같은 폭력이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비율이 5%로 줄었고, 21세기로 들어와서는 1%로 줄었다고 합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전세계의 사망자 수는 약 5,600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12만 명, 폭력과 같은 범죄로 죽은 사람이 50만 명인 반면, 자살로 죽은 사람은 80만 명이고, 당뇨병으로 죽은 사람은 150만 명이나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전쟁에 쓰이는 화약보다도 당뇨병을 일으키는 설탕이 생명에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테러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살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21세기에는 전쟁은 곧 모두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가 전쟁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류의 최대 적들을 극복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예전에는 기근이나 전염병 등을 하나님의 심판이나 벌로 여겼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의학적 기술로 인간 수명이 100세 시대에서 200세 시대로 옮아가고 있고, 예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나 천재들이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서 이룰 수 있었던 일을 이제는 인공지능인 AI가 순식간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 세계는 누가 정보를 지배하느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점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인간이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바벨탑 사건처럼 인간의 교만은 점점 심각해 갑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은 아예 교회를 말살하는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Ⅱ.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정말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핵심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 ‘이 세대’란 말은 헬라어로 ‘아이온’인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속한 시대에서 그 세대의 문화와 풍습을 따라 사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 받는다’는 말은 ‘함께 형성된다’는 말로 ‘같은 모양으로 동화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를 불러 주셨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채 오히려 이 세상이 추구하는 일에 동화되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목적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니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저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일이고, 성공하는 것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길을 따라 살면 바보 됩니다. 세상과 세대를 본 받으면 정말 바보 됩니다. 절대로 잘 살 수 없습니다. 절대로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천국갈 수 없습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변화를 받는다’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질적인 변화, 즉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제가 제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볼 때, 변해지지 않는 모습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동시에 목회의 가장 커다란 좌절은 이 많은 예배와 성경공부, 그리고 이 많은 훈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변할 수 없을까요? 변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변화를 받으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변화를 받는 방법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걸어갔던 여정 자체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훈련받은 코스였습니다. 여러분 광야는 애굽과 가나안의 중간에 있습니다. 애굽은 어둠과 죄악의 도시이자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옛 모습입니다. 가나안 땅은 새로운 약속의 땅이자 우리가 새롭게 가꾸어 가야할 영적인 모습입니다. 그 옛 모습, 옛땅과 새 모습, 새 땅 사이에 광야가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메시지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로 애굽을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로 옛삶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로 가나안을 내 삶속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 변화가 올수가 있습니다. 오늘 내가 나에 대해서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 많은 삶의 조건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 은혜 앞에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현상은 2절 하반 절에 말씀처럼 분별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고 기뻐하는 뜻’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움켜쥐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까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멀리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 거룩한 것과 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를 물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속담에 “뛰어봐야 벼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벼룩 크기가 2-3밀리 밖에 안 되지만 무려 30센티까지 뛸 수 있다고 합니다. 무려 자기 몸의 백배를 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으로 비유해 보면 대략 저 여의도의 63빌딩 높이를 뛸 수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도약력입니다. 그러나 사람 눈에는 아무리 높이 뛰어봐야 고작 30센티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똑똑한 척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유발 하라리 교수가 쓴 『호모 데우스』를 읽으면서 한 편으로는 전율을 느끼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유발 하라리 교수가 말하는 그런 세계가 올 것인가 하는 것이고, 그가 주장한 것처럼 이제 인간사회에서 신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인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그렇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엄청난 속도로 과학이 발전하고, 삶의 환경이 좋아지면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 굳이 하나님의 자리, 전능자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문명의 발달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아무 리 미래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예측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미래는 늘 우리가 예측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 지금 삶에 힘든 문제가 있습니까? 평안한 단잠을 빼앗아가는 어려움이 있습니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뭔가가 나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우리 사회를 위협한다 하더라도, 경제 침체로 우리가 생활하기가 아주 어렵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희망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기억하십시다. 이 세대가 추구하는 일에 젖어드는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 삶을 견고한 세상의 터 위에 세워놓는다 하더라도 우리 삶에 찾아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채 쌓은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은 견고하게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역대하 20:20)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지켜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앞날이 불투명하여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37편에서 말씀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37:5-6)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선하게 인도하시어 빛과 같이 빛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의 삶을 흔드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때로는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을 잃게 하실 수도 있고, 내게 의지가 되었던 소중한 것을 무너뜨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우리가 헛된 것에 기대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견고한 성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든든한 도움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이 우리 안에 가득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