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생각 3가지 롬12:3-8.
지금 우리는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가뜩 어려워진 경기는 더 위축이 되고 또 나라는 분열의 조짐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사람마다 불신의 벽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더욱이 지금 한반도는 세계의 태풍의 눈으로 열강의 표적이 된 정말 어려운 현실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선거철이 가까이 다가왔는데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던 중에 미국의 대통령 선거 후보가 떠오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그 큰 대륙에서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단일민족은 아니지만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통일성을 가진 국민으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대선 때 민주당 후보로 흑인인 잭슨 목사와 듀카키스가 나왔습니다. 당시 잭슨 목사는 듀카키스에게 패배했지만, 그가 했던 연설은 길이 후대에 남을 만한 명연설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연설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마이큰 듀카키스는 양친 중 한분은 의사셨고, 한 분은 교사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하인이었고 미용사였고 경비원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상이에는 종교, 지역, 인종의 와이,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의 진수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 다수의 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와 나의 오솔길이 한 곳에서 만나도록 한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둘의 앞 세계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짜여진 담요가 아닙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보냈던 나의 유년시절, 나의 어머니는 담요 한 장 미련해 주지 못하셨지만 어머니는 슬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춥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머니께서는 털 헝겊이나 방수 천, 부대자루 등 구두나 닦을 수 있는 조각 천들을 모아서 그것으로 훌륭한 누비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모양을 상징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비이불’을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힘은 바로 이 ‘누비이불’과 같은 다양성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잭슨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다양한 지체를 가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해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면 십자가의 보혈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임을 아십니까? 지체인 우리는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으로 사는 것 믿습니까? 지금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참된 예배자로 서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 다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을 보여 줍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교회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움의 정도도 다양합니다. 연령층도 다양합니다. 피가 끓는 젊은이들도 있고, 가만히 앉아만 계셔도 마음이 든든한 어머님 아버님과 같은 분들도 계십니다. 직업도 다양하고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좀 여유 있게 사시는 분도 있고,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조차 힘들게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격적으로도 다양합니다. 차분한 분부터 성격이 느긋한 사람도 있고, 무엇인가 주어진 일이 있으면 빨리 처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 ‘동성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섬기고 사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모습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가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했는데 이것은 교회에 대한 탁월한 묘사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개념입니다. 5절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예수를 믿는 순간, 나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신비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지어놓으셨습니다. 다양한 신체와 장기들, 신경조직과 세포들로 연결되어 하나의 몸이 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엡2: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권속은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다는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면 십자가의 보혈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코라고 해도 얼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굴러다닌다면 섬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등록을 한다는 것은 세상의 멤버십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멤버십은 마음에 안 들면 탈퇴하면 되지만, 그리스도 몸 안에서는 탈퇴가 불가능합니다. 몸 안에 있으므로 분리가 되지 않는 관계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손가락에 상처가 생겼는데 이것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가서 손가락을 잘라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프면 싸매 주고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손가락은 몸의 일부이고, 몸은 손가락을 보호해주고 회복시켜주는 기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건은 고장 나면 빼버리면 되지만 손가락은 생명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끝까지 품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몸 안에서 함께 자라가고, 몸 안에서 보호받고, 몸 안에서 우리 신앙의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너무나도 다른 나를 여기 동성교회로 보내주신 것은 여기에 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보시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생활할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다양한 은사를 주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은사”란 무엇입니까? ‘은혜의 선물’, 영어로는 ‘Gift’라고 합니다. 은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일을 잘 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능력입니다. 고전 12:11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다시말하면 ‘거져 주시는 선물’이란 말입니다. 왜 나누워 주신 줄 아십니까? 고전12:7절에 보면,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유익하게”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4장에 가서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바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덕을 세우게 하는, 교회를 섬기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은사를 교회가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Ⅰ. 내 주제에 맞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 은사를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가 본문의 내용 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여기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냉철한 판단에 근거하여 생각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바로 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생각’입니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분수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은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되면 받은 은사가 힘이 없어지고, 결국에는 소멸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됩니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성령의 은사는 각 개인이 교회를 섬기는데 유익하게 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각의 사람에게 맞게, 교회의 덕을 위해, 유익을 위해,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Ⅱ. 냉정하게 생각하라
그래서 은사발견이 중요합니다. 그 유명한 은사론이 등장합니다. 본문 4-6절에 “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여기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몸된 그리스도안에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구조를 보면 한 몸안에 모든 지체가 똑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다 각각 기능이 달라요, 그러면 왜 지체마다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 몸을 섬겨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다시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그렇습니다. 제가 받은 은사는 성도들하고는 다른데가 있습니다. 은사가 다른 만큼 제가 교회지도자로서 해야 할 책임이 다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똑같이 헌금하고, 똑같이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무엇이 다르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일은 하도록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은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섬기라고 성령께서 지체된 우리에게 사람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거기에 합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중에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못 받았다면 그 사람은 지체가 아닌것입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자기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일을 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묻어두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Ⅲ. 은사에 대한 바른 생각
바울은 6하-8절에 중요한 7가지 은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가 7가지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양한 은사 중에 몇가지 예를 들었는데 어떤 성경학자는 이것을 성도로 하여금 모든 봉사의 동기를 형성케하는 동기적 은사라고 얘기 했습니다. 다같이 보십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우리는 내가 안 가진 것들 때문에 남들을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안 가진 것을 가진 자매와 형제들이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양성 속에서 생명적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곳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5절에 ‘서로’라는 단어가 나오고, 10절에도 ‘서로’가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이 아주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모이게 하신 이유는 혼자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고 어떤 기여를 하고 있다면 동시에 나도 공동체 안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주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양한 지체의 기능을 통해서 움직일 수 있게 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동성 교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은사면에서 안목사와 똑같다면 아무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다양한 신분, 다양한 은사를 가진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섬길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심사,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생각은 바로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주신 은사는 교회에 다양성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 12명의 제자들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는 너희가 온 인류를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12명만이라도 사랑한다면---세상은 변화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중에는 사랑하기 어려운 가롯유다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십시오.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은 기도할 것입니다. 기도하며 원수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사랑으로 봉사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0절을 자세하게 보시면 '먼저'하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네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면 나도 너를 사랑할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사과를 하면 나도 너를 용서할 수 있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세상에서의 조건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 우리는 늘 지혜롭게 생각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성숙한 교회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힘들다고 지쳐하시 마시고 우리 힘을 냅시다. 주의 위로가 교회 안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