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롬 13:1-7. 2020. 3/15.
최근에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가 혼란스러운 이 시대를 향하여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혼돈의 이유는 요즘 사회가 아버지가 없는 사회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회, 무슨 말입니까? 권위가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집안에서 아버지가 한마디 하면 집안의 질서가 잡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부터 남편 알기를 발사이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아요. 자녀들도 역시 반항하고 아버지를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권위의 상실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장 큰 아픔은 바로 권위가 무너진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지도자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요. 특히 정치인들에 대한 인식은 땅에 흩어질 정도로 그 권위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때 유행하던 농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강물에 수녀 한 분과 국회의원이 동시에 빠졌는데 구조 대원이 급히 달려가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었는데 수녀를 먼저 건질 줄 알았는데 국회의원을 먼저 건지더랍니다. 그래서 어째서 수녀는 안 건지고 국회의원을 먼저 건져냅니까? 라고 묻자 구조대원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래도 국회의원을 놔두면 한강 물이 오염될 까봐 빨리 건져낸 것입니다. 이런 유머들은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의 공감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결국 정치의 장은 누가 책임지며 이 나라 이 민족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정치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성숙하지 못함 때문에 실망도 크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나라 금세기의 역사를 보면 그 동안 여러분의 대통령이 배출되었습니다. 역대 대통령 한 분 한 분을 돌이켜보면 흐뭇한 일보다는 가슴 아픈 일들이 더 많이 기억납니다. 당시에는 감추어져 있던 사건들이 세월이 가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또 다른 고통과 배신감을 느낍니다.
요즘도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매우 무겁습니다. 이제 꼭 한달 남은 총선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도 지금의 현 정권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처럼 시국의 어려움을 대처하는 일에 대해 다는 아니지만 정치인 가운데 국민들의 정서와 맞지 않는 행동을 볼 때 난감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또는 비판일변도로 모든 것을 불신하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니잖습니까? 지금 우리는 롬13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12장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했고 13장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Ⅰ. 통치자의 권위를 존중하라(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말씀에는 통치자들의 권위를 존중하고 높여야 될 두 가지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통치자의 권력을 존중하지 않으면 권력을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 이는 매우 큰 죄악이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통지자의 권리를 반드시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늘 말씀을 읽고 마음에 반감이 일어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다보면 즉각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올 수 있는 반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히틀러 같은 악한 지도자에게도 복종해야 합니까? 김일성이나 김정은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을 가능성이 많아요. 이 말씀은 독재권력, 부패한 권력, 부당한 권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세상의 독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본문입니다. 실제로 독재와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성경을 인하면서 복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독재정권 때, 데모하고 반정부 투쟁을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등을 돌리고 교회를 떠나기 도 했습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자들도 성경 말씀을 오해하였고,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도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로마제국을 네로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귀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포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를 존중하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좋은 지도자라면 어느 누가 안 따르겠습니까? 순종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좋은 지도자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도자가 지도자답지 않을 때 누가 그 사람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더욱이 엄청난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고통 주는 자 앞에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대해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최선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고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뜻은 ‘허용적인 뜻’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인간의 타락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타락은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타락을 하나님이 허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허용하셨을 때 그것이 당장은 우리의 눈에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온다고 하나님께서 판단 하셨을 때 그것이 최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히틀러나 김일성을 세우신 것이 본래 하나님의 의도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선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하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시고 승인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배우게 하십니다. 악을 허용하심으로써 선의 중요성을 배우게 하시고, 불의를 허용하심으로써 의를 배우게 하십니다. 마침내 주님은 이 일을 통해 사람과 역사에 이 모든 것이 유익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지도자라 할찌라도 하나님이 승인하셨다면 질서유지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악한 제도도 그 제도나 그 정권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나쁜 권위는 없는 권위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마22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주 미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마22:17)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백성을 배신하는 매국노라고 규탄할 속셈이었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로마 정부에 반대하는 국법을 어기는 반역자로 고발할 속셈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은전 하나를 내보이시면서 이 은전에 누구의 형상이 그려져 있느냐 물어 보셨고 그들은 가이사의 형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의무, 하나는 지상의 정부를 향한 의무와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의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이 땅에 살아갈 때 주가지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시민으로 살아가고 또 하나는 이 땅에 대한민국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 때입니다. 무엇보다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요즈음 우리의 고민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요 19:10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요 19:11절에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다는 권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에 의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Ⅱ. 지도자자가 가져야 할 자세 3-4절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는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소유여부를 떠나서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징치할 칼을 주셨다고 합니다. 칼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치자에게 벌할 자를 벌하기 위하여 공권력을 사용할 권리를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의지에 거스르지 않는 한 나라 법에 불복종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선’이라는 단어와 ‘악’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그들을 세우셨습니까? 선을 집행하기 위해서 또는 의를 집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칼을 잡고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만약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집행하는 도구로 변신한다면 크리스챤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이 아닙니까? 여기에 대하여 지난날 믿음의 선배들은 ‘시민 불복종의 권리’라는 자세를 가지고 의연하게 이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보세요. 만약 눈앞에 보이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될 경우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로를 보세요. 느부갓네살 왕은 그가 세운 금신상에 절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순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풀무불에 들어갈 각오를 하고 왕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더 높은 권위, 모든 권세의 궁극적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절한 것입니다.
Ⅲ.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6,7)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모든 종류의 세금이나 공과금을 빠짐없이 정확히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세당국자뿐 아니라 모든 공직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은 나라 법과 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모든 나라가 법과 질서를 따라 다스려지기를 원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금 잘 내야 합니다.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장전입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법 투기로 재산증식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찰에게 함부로 화염병 던지고 쇠파이프 휘두르는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공공기물을 파괴하고 시내교통을 마비시키며 무법천지로 만드는 시위행태도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원칙과 질서가 바로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무너지면 무질서가 일어납니다. 이를 위해 할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딤2:1-2절에 보면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지난 수 십년 동안의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는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세계가 놀라는 경제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능력이 많아서 이 일이 가능했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감탄하는 변화하는 시대의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도 일어설 수 있었던 배후에는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정부 방침을 역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정부를 세우시고, 교회와 정부 각각에게 독립된 통치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에는 영적 권세를 주셔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정부에는 시민적 권세를 주셔서 시민으로 준수해야 하는 여러 법령을 제정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의 영적 권세와 정부의 시민적 권세는 서로 혼동되거나 침해하지 않으며, 서로 부정하거나 배척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시민적 권세를 행사하거나 거부하여서는 안 되며, 정부가 영적 권세를 행사하거나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적으로 예배를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몹시 걱정스러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간섭으로 위기를 넘기게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치를 보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환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공포와 두려움 속에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 총선을 앞두고 정치나 경제나 사회의 여러 가지 면에서 실망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오, 이 나라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 지도자가 되든 간에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정치적 책임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성도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이 나라는 하나님이 기뻐 쓰시는 소망이 넘치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정말 다시한번 어두운 역사에서 빛을 가져오는 새로운 내일을 창조하기 위해서 주 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범죄를 회개하고 우리 자신이 주 앞에서의 모든 잘못된 삶을 다시 고치고 기도로 엎드릴 수 있다면/ 그리고 이번 선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강렬한 우리 마음속에 부담을 갖고 주님을 의지하며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투표장으로 향할 수가 있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십시다. 주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