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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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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롬 13:8-1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03-21 | 조회: 569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13:8-10. 2020. 3/22.

 

사랑하는 동성의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평안하신지요? 이렇게 화상 예배를 드리니 참 가슴이 먹먹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위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건강이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경제적인 활동이 위축되면서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들이 너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로, 사람들의 외부활동을 자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활동반경이 줄어들어 더더욱 우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몇 명이나 늘었는지가 우리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고, 코로나 사망자 숫자가 연일 보도되면서 우리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전 국민이 병실에 입원해 있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앙인들은 그런 힘든 시기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면서 위로를 받고 답답한 인생의 탈출구를 찾는데, 예배마저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하는 오늘의 상황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예배당에 나와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릴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그것이 없을 때 비로서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비록 잠시지만, 목장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기관과 교회학교가 이번 계기로 더욱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섬겨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그가 살던 고향 도시지역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닥터 앨 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빚 갚기 위해 서입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통 빚으로 만들어졌다이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30살에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흑인들을 위해 의사로 복음전도자로 90평생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 안에는 엄청난 하나님으로부터 빚진 자임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의 죄를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를 37번째 시간을 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8-10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자설교를 또 할 필요가 있습니까? 들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하여 다시 설교해야 합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다 들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합니까? 이 문제를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8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이 말씀의 강조점은 할 수 있는 한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중요한 전제는 우리는 모두 별수 없이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롬1:14에서 자기 스스로도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까? 특별히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의 채권자가 나옵니다. 14-15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여기 나오는 채권자들은 바울에게 빚을 빌려 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해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이전에 바울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한순간에 인생이 뒤집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순간에 그는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복음의 빚 앞에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것은 바울에게 엄청나게 크고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눈이 열리고 자기 삶의 길이 바뀌는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의 죄를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한때 교회를 무너뜨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했던 그였지만, 그는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자신이 보아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결국 목이 잘리우는 참수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의 빚을 위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고도 남습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만약 무기수가 감형을 받아서 출옥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이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만나고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복음은 내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집도 외할아버지가 절을 가지고 있었고 철저한 불교 집안이었는데 집안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황홀하고 기쁘고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그 감격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오늘 이 방송을 보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산적이 있나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은혜구나! 존재라는  것이 신비구나!’하며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 은혜 앞에 살아가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이 땅에 머무는 그 순간까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 사랑 - 율법의 완성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우리 인체로 말하면 몸을 지탱하는 골격입니다. 몸에도 이 골격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무려 613개의 계명으로 나누어서 유대인들이 지켜 가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방대하고 세밀한 계명의 내용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계명을 모두 지키는 일이 우리에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은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막12:29-31절에서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대신(對神) 계명입니다. 그리고 5-10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필요한 대인(對人)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것 - 율법의 마침이요, 율법의 완성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왜 간음이 일어납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간음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잠깐의 쾌락을 위해서 간음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살인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강도질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간음도 살인도 강도질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면 다툼도 사라집니다. 아멘.

 

. 받은 사랑을 갚으며 살아야 합니다.

8절을 다시 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여기 사랑을 라틴어로 아모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르는 죽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곧 희생이 없이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희생적 사랑 곧 아가페 사랑으로 확증하셨습니다예수님 외에도 당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십자가 옆에는 또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들이 죽음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이는 죄가 없으신 온전하신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희생하시는 아가페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살리고 우리에게 사랑의 가치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2개의 대표적인 호수가 있습니다. 요단강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에서 흘러온 물이 모이는 갈릴리 호수가 있고, 요단강을 통해 갈릴리 호수 물이 흘러들어가는 사해가 있습니다. 헤르몬산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이는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전 국토에 물을 흘려보내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고, 물고기가 풍성한 생명의 바다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물이 모이는 사해는 물을 밖으로 내 보낼 수기 없기 때문에 물고기 한 마리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누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풍성함이 있지만, 모으기만 하는 곳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요? 사랑이 많은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못해도 사랑은 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도 사라지고 소망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금 나라가 온통 코로나19 사태로 뒤숭숭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게 이 사태를 대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을 믿고 우리의 건강과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두려워 떨 필요는 없습니다. 도망치거나 피하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우리가 이겨낼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머지않아 극복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8-10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욱여싼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상황이 우리를 아무리 답답하게 조여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 어떤 세력이 우리를 거꾸러뜨리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초월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삽니다. 이번 사태 속에서 교회가 세상 앞에 짐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와 불안에 떠는 세상 앞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품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방역당국의 관계자들과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피땀흘리며 수고하고 있는 의료진들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국가적인 비상상태에 빠진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이 땅을 고쳐주시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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