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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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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고난주간) 예수님께서 마신 잔 (눅22:39-4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04-05 | 조회: 656
예수님께서 마신 잔 눅22:39:-46. 2020. 4/5. 고난주간 

사랑하는 동성의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평안 하셨는지요!! 지금 방송을 보지만, 옆에 교우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시죠!!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 예배드린다면 격려의 인사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기도 할 때의 일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한번 났다가 다 죽지만, 이 십자가의 죽음은 죄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기 위한 죽음이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 모두가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족이나 사대부들이 죄를 지었을 때 왕이 극약을 내려 마시고 죽게 하는 사형방법이 있습니다. 왕이 왕족이나 사대부들의 신분을 참작하여 교수나 참수를 면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은혜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약이라 할 때 하사할 ‘사’(賜)자에 독을 뜻하는 ‘약’(藥)자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사약은 왕이 내린 독이라는 뜻입니다. 왕이 사약을 내릴 때 일반적으로 금부도사가 왕명과 함께 가지고 갔습니다. 왕명이 전해지면 사약이 든 잔을 정중하게 상 위에 받아놓습니다. 그리고 왕을 향해 예를 표한 뒤에 마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리 왕이 내린 것이라고 해도 사약만큼은 면하고 싶어 했습니다.오늘 본문 42절을 보면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치 사약을 받게 될 것을 알고 마음을 준비하고 있던 예수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쓴잔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아시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고난의 쓴 잔을 마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 고난의 잔인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Ⅰ. 겟세마네에 오르신 예수 (39절)
39절 보니까, 보통 때의 습관대로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해발 810미터의 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한 산으로 감람 즉 올리브가 많이 있어 ‘감람산’이란 이름을 붙여졌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면 대개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 일행이 자주 가던 곳은 그 가운데서도 서쪽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본문에는 그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보면 명시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라는 지명이 ‘기름을 짜는 틀’이란 뜻입니다. 거기에 기름을 짜는 기구가 많이 설치되어 감람유(올리브기름)를 짜던 곳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감람유는 무거운 돌로 짓눌러 짰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기름을 짜내듯 모든 진액을 뽑아내는 고통을 겪으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이름이 묘하게도 예수님의 고통을 미리 예언한 셈입니다. 지금 주님은 진액을 짜듯 기도하십니다. 그 내용이 여기 41절 상반절에서 42절에 나와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셔야만 하는 ‘잔’이란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내리신 잔입니다. 마치 왕이 내린 사약을 죄인이 받듯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고난의 잔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보면 이 잔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셨다는 것입니다. 

마 26:37-39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고난의 잔을 받으시기 직전에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까지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까지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무려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3번씩이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이리 같은 존재, 죄로 범벅이 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Ⅱ. 이 잔을 왜 받으셨나?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께 이 잔을 받게 하셨을까요? 왜 마치 왕이 사약을 내리듯이 예수님께 이 잔을 내리셨을까요? 그것은 이 잔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어떤 희생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낮고 천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남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짐승냄새가 펄펄 나는 구유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존귀히 여김 받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귀신에 사주를 받은 사람’이라거나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시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외면 당하셨습니다. 이방인인 로마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세상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버리고 죽였습니다. 그걸 아시면서도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과연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서 희생을 치를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헨리 나우웬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자요, 신학자입니다. 오랫동안 노틀담 대학과 예일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매년 무게 있는 책을 한 권씩 써 낼 정도로 부지런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1996년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10년을 캐나다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라고 하는 정신 지체 장애인 수용 기관에서 봉사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끝까지 맡아서 돌보던 장애아는 아담이라는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는 중증 장애인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옷도 혼자 힘으로 입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심한 장애를 안고 있던 터라 자기를 돌봐 주는 사람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는지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우웬 박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를 닦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제 맘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만도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심한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 영광의 주님이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 이 잔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영상을 보시는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 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Ⅲ.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45- 46)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생활이 무엇입니까? 영적 생활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던 사람이/ 믿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성령의 감화와 인도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그의 자녀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이며, 비밀의 세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역사의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들은 그들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 45-46절을 보세요.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성도로서 실패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당당히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기도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그 고난의 잔을 들면서도 우리에게 부탁하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 우리에게 맡긴 사명의 잔을 감당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주변 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열정도 헌신도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겠어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해 지고 /두려워지고/ 사는 것이 겁나고/ 무능한 자신 남처럼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나중에는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붙들어 주는 손도 없고/ 기댈만한 것도 없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힘이요. 힘입니다. 세상을 살게하는 힘이요./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이요./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이요,/ 절대로 기죽지 않는 힘이요,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이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 살 수 있는 감사하는 만드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해요, 세상에 살게 하는 힘이 필요해요,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그 분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다시 한번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예배마저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하는 오늘의 상황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결코 상황에 위축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고후4:8-10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욱여싼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상황이 우리를 아무리 답답하게 조여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 어떤 세력이 우리를 거꾸러뜨리려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 안에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초월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삽니다. 그러므로 비록 서로 다른 장소이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 주간 하루 10분만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10분만 묵상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 앞으로 다가 가세요. 하루 십분만 그분 십자가 밑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여러분의 손을 담그고/  세상사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심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그 은혜로 우리도 일어 설 것입니다. 내게 맡긴 잔도 넉넉히 감당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이 갈망이 고난주간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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