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희망을 사야 할 때입니다. 렘32:6-15.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는 이 와중에도 총선이 끝났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코로나 대란을 겪으면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과거 IMF 때보다, 그리고 2010년도에 일어난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에 한국교회는 다시 회복될 것인가? 라는 글이 국민일보에 실렸습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중요한 것은 코로나가 가져다준 교회 환경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시대나 사회 문화가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파괴하는 환경으로 변화됐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 이탈자 증가, 새신자 감소, 재정의 감소로 인해 교회에 극심한 위기가 올 것으로 진단을 합니다. 21세기교회성장연구소 김두현 박사는 “오는 9~10월이 되면 소형교회는 물론 중·대형교회를 포함해 30% 안팎의 교회가 극심한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예측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 우려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위기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때는 주전 587년의 일입니다. 이때는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기까지 일년도 남지 않은 그런 상황입니다.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이미 바벨론의 군대가 포위를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당년 나이 57세였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다가오는 불길한 미래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합니다. 이제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멸망하고 유다왕 시드기야는 사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드기야 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유언비어 살포와 민심 소란죄와 괴씸죄까지 뒤집어 씌어 잡아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사촌이 한사람 찾아왔습니다. 하나멜이라는 사람인데 예레미야를 찾아와서는 자기 밭을 사달라고 합니다. 하나멜이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져 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죽하면 감옥에 갇혀있는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자기 밭을 사달라고 했겠습니까? 물론 당시의 법으로는 땅을 사고 팔 때는 반드시 친척에게만 사고 팔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위로는 못할망정 자기 밭을 사라고 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밭을 삽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나간 소리하지 말라고 야단을 쳐서 보낼텐데 예레미야는 아무 말 없이 밭을 삽니다. 이것은 믿음의 결정이라 할 수 있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희망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밭을 사는 행위는 미래를 사는, 희망을 사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례미야가 밭을 사는 이 행위는 단순히 밭을 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사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례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례미야의 한 모습입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희망의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그의 시대에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심판과 동시에 저 건너편에 있던 희망을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는 이 절망적인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창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Ⅰ.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6절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에례미야에게 무엇이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모했고 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전해주는 소리나 뉴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어렵다든지, 전쟁 중이라든지,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사람들의 말이 많아집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시중에 별의별 소문이 다 돕니다. “OO회사가 곧 망한다더라,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진다더라, 달러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금을 사두어야 한다더라,” 등등 전혀 근거 없는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닙니다. 모르긴 몰라도 본문이 기록된 당시에도 수많은 소문들이 난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7절입니다.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물론 감옥에 있는 그가 땅을 산다고 하니까 감옥 밖에 있는 가족들이 말렸을 것입니다. 주위에서 예레미야를 향해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있습니까? 혹시 꼭 귀 기울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은 마땅히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게 될 때,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들어야 할 양심의 소리는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유혹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Ⅱ.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밭을 산 것은 그에게 있어서 손해되는 투자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 밭을 샀습니다. 10절부터 1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지금 예레미야는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가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사촌인 하나멜과 1대1로 조용하게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갇혀 있는 시위대 뜰 앞에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출신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계약을 했습니다. 그는 두 장의 계약서를 작성한 후 한 장의 계약서는 잘 접어 묶은 다음 겉을 잘 봉인한 반면, 다른 한 장의 계약서는 봉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멜의 밭을 산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장의 계약서를 제자인 바룩에게 전해주어 토기 항아리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토기 안에 귀중한 문서를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예레미야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레미야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얼마든지 하나멜과 단 둘이 조용하게 계약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약서 한 장은 봉인하지 않고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실망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라가 곧 망하게 된다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꿈을 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상황은 절망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곧 회복될 것입니다. 지금은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이제 모든 것이 정상을 되찾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밭을 산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예레미야처럼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 대신에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말은 자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죽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N-Vir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국가나 사회가 오랜 침체의 기간을 지속해 오다 어떤 계기를 맞아 비약적으로 발전을 할 때 그 공동체가 갑작스럽게 발전을 하게 되는 원인으로 N-Virus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N은 영어 Need란 단어의 머리글자로 필요, 요구 등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바이러스란 단어의 앞에 붙여 그 공동체나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 할 수 없다.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 절망하고 있을 때 ‘아니야. 우리는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어!’라고 말하며, 패배의식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다시금 일어서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N-Virus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을 주고, 긍정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희망을 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N-Virus를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절망을 노래하고 있을 때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 희망은 기도를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우리가 새롭게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Ⅲ. 예레미야는 눈앞에 있는 것을 보기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했습니다. 만약 예레미야가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았다면, 그는 그 밭을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멀리 보았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 절망의 환경 가운데 그것도 내일을 보장 받을 수 없는 감옥에서 어떻게 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에레미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다음 장 33장에 보세요. 1절에 보면,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의 상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2절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장 무섭고 절망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예레미야가 절박한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적인 한계 속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져있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기대하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기대하는 것,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이 건강한 신앙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 기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안달하십니다. 성경은 기도의 책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에 대한 말씀이 아주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기도에 대한 구절은 하나님의 편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86편 7절에 보면,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16장 23-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3절에 보면,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크고 은밀한 일은 무엇일까요?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포로로 붙잡혀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했던 유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전 지역이 폐허가 되고 바벨론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에서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실 미래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망하는 것만을 보았지만, 그는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희망을 살 때입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던 뉴욕시내 한 가운데에 살고 있는 백인 친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두 친구가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시내의 시가지를 걷고 있었는데, 인디언 친구가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이런 시내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음 가운데서도 귀뚜라미 소리를 들은 겁니다. 그때에 백인 친구는 ‘야! 이 뉴욕 한가운데에 무슨 놈의 귀뚜라미 소리야?’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인디언 청년은 친구를 따라와 보라고 하더니 길모퉁이에 있는 넝쿨로 된 집의 벽 틈에서 귀뚜라미를 찾아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사람들은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고 있습니다. 돈의 소리에는 민감합니다. 욕망의 소리에는 민감합니다. 그러나 정말 들어야 할 소리에는 귀를 닫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쉽게 좌절하고 쉽게 절망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 모두가 정말 힘든 시대에 서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우리를 향하여 애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세상 소리에 귀 울이다 보면, 잃지 말아야 할 것마져 잃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께서 당신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의 지체로 흔들림이 없이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기보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음성을 듣는 데에 힘을 씁시다. 이제는 희망을 살 때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믿음의 눈으로 내일의 희망을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