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엡6:4. 잠1:8 2020. 5/3. 어린이 주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엔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또 스승의 날도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달이 바로 5월입니다. 5월을 영어로 May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청춘'이라는 뜻입니다. 연중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5월은 나머지 11달과 바꾸자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달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런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이 아름다운 가정이 요즘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정에 대한 생각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선 결혼생활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
또한 가족에 대한 생각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꼭 부모를 모셔야 하는가?’라는 생각은 이제 보편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노후에 독거하는 어르신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어쩔 수 없는 상황가운데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거하는 가족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욱 주목할 것은 가정의 형태가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독세대 형태가 급증하고 있고, 혈연이 아닌 다른 여러 사유로 맺어진 가족 형태가 생겨나고 있고, 재혼가정들이 눈에 띠게 늘고 있고, 그리고 다문화 가정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다양한 가정 형태에 저마다 다양한 가정의 문제들, 가정의 갈등 상황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과거의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참 많고 많은 문제들이 가정 안에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가정이 파괴되거나 해체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 건물들이 흔들리며 큰 위기를 겪는 것처럼,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가정들이 흔들리며 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바울이 살고 있었던 시대도 오늘 이 시대 못지 않은 급격한 윤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가져온 '팍스-로마나'의 식민지 문화는 기존 전통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부모와 자녀사이의 전통윤리에도 상당한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돈을 찾아, 자유를 찾아 부모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가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와 같았던 에베소에는 아테미의 신전을 중심으로 사회가 음행을 합법화해주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거대한 로마식 체육관은 젊은이들의 힘과 기예를 한껏 상품화하고 있었고, 노인들은 사회의 짐스러운 구성원으로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변인간으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주후 60년대 초 그가 삼년여를 정성을 쏟아 양육하고 세웠던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전달합니다.
이제 5월은 특히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히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자녀 어떻게 키울까요?’는 부모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시편 127편 3절을 보면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선물인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Ⅰ. 자녀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4절입니다. “아비들아”. 왜 바울은 “어미들아, 아비들아”하고 부르지 않고 “아비들아” 하고 불렀을까요? 아버지에게만 자녀양육에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은 아버지, 어머니 모두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자녀를 낳는 것으로 부모의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27:3절에 보면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말은 숙제라는 의미가 있고, 상급은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숙제요, 선물입니다. 오늘 말씀에 “아비들아”하고 말합니다. 자녀양육의 책임이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을 아내에게만 맡기지 말고 남편인 너도 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무신론의 심리학)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의 가정을 연구한 책입니다. 연구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무신론자 100%는 모두 아버지가 잘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샤르트르,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모두가 아버지가 없거나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나쁜 아버지였거나 자식에게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였습니다. 먼저 무신론자 니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약했습니다. 병들고 약하고 생기없고 자녀들과 대화가 없고, 그래서 결국니체는 평생 병들고 나약한 기독교를 평생 공격하며 살다가 자살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공격한 병든 기독교는 아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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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가 있습니다. 이 사람 아버지는 자살했습니다. 어머니와 아주 나쁘게 지내다가 건물 3층에서 운하로 뛰어들어 자살로 죽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이 심해서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를 낳을 마음도 없었고 낳은 후에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불행한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아버지 야콥은 아들이 보기에도 실망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도 없는 데다가 성도착자였습니다. 그의 성적인 심리학은 아버지가 모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 혐오가 거부감이 그의 무신론적 심리학의 출발입니다. 시베리아를 피로 물들인 소련의 스탈린이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거칠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느라 집을 자주 비웠고 술을 많이 마셨고 아내를 때렸습니다. 어린 스탈린은 어릴 때 그래도 착해서 신학교까지 들어갔지만 나중에 신학교를 중퇴하고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자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 6천만을 죽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어릴 때 자주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강팍하고 다혈질적인 남자였습니다. 아버지가 몰래 좋아한 여자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그는 훗날 유대인 600만명을 죽였습니다. 그 많은 무신론자들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를 통해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좋으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잘못되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얼마나 부모의 책임이 큽니까? 이 시대에 기도하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Ⅱ.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노엽게 하다'는 말은 '배가 항해를 하는데 바람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배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격노케 하는 것은 더 이상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기를 꺾어버리고 용기와 의욕을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슨 미래가 있고 성장을 기대 할 수 있습니까? 골3:21절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낙심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쉽게 마음에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귀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아이를 대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의 성품과 은사를 무시하고 부모의 주장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보화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품과 특성을 살려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기쁨으로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아먹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랑의 그릇에 사랑에 고갈되지 않도록 칭찬과 격려로 사랑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돌탕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돌아온 탕자' 자신이 받아야 할 유산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그 재산을 받아다가 허랑방탕하며 다 탕진해 버리고 이젠 생존을 위해 남의 집에 돼지 치는 사람으로 들어갑니다. 그럼에
도 그는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아 버지 집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 집에 가면 최소한 굶진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거지꼴로 되돌아오고 있는 둘재 아들을 발견하고는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선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을 다시금 아들로 맞아줍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감히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 '품꾼으로나마 받아 달라'고 요청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그 동안 어디에 가 있었느냐? 고'그 많은 재산을 가져다가 어디에 썼느냐?고, '왜 이런 거지의 몰골이 되어서야 돌아오느냐?고 따지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 아들은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내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었다.'고 기뻐할 뿐입니다.
여러분, 그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며 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듬어주시고, 다시금 회복시켜주십니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도 숨 쉬며 살 수 있습니다. 그 한없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죽었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해 주지않으셨다면 우리는 실패의 자리, 실수의 자리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사랑, 그 은혜 앞에 선 분들이 부모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자녀들과 대화가 끊긴 가정이 있나요? 상처를 준 적이 있나요? 우리의 자녀는 칭찬과 격려 속에서 자라납니다.
Ⅲ.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직’이라는 말은 다른 길은 없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양육을 합니까? 주의 교훈 “The training” 주님의 훈련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자녀 양육에 있어서 예방에 대한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고 여기 “훈계”란 치료의 성격이 있습니다. 신속한 치료를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쳐주는 치료, 이것을 훈계라 얘기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부모가 상처를 줄 때도 있고 자식이 삐뚫어질 때도 있지요. 이때 지체하지 말고 신속하게 치료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양육, 힘든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보람되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자녀가 말씀 안에서 자라고 그 영혼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그대로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이 발휘되도록 각자의 가정뿐 아니라 공동체가 힘을 쓸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케 하는 일에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자녀는 결코 애물단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한(恨)을 풀어낼 도구도 아닙니다.
한 아이에게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가능성의 꽃을 피워낼 때 그 아이의 영혼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재능과 은사를 개발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신 그 인생을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떠나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부모의 못다 이룬 인생을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야 할 그들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어느 날 미련 없이 떠나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떠남의 날을 생각하며 오늘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최선의 준비가 무엇인가를 기도하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샌디 워너(Sandy Warner)라는 기독교 동화 작가의 독수리 이야기에서 부모 독수리가 아기 독수리와 작별하는 순간의 묘사로 저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부모 독수리는 자녀 독수리가 부모의 품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느끼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녀 독수리를 비상시키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 곁을 나르며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