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길잡이 - 스승 요14:6. 2020. 5/17. 스승의 주일.
오늘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여러분의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평생 숫한 만남의 사람이 있고, 인연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일 것입니다. 인생에는 스승이 세분이 계십니다. 첫째 부모님-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스승입니다. 둘째 학교 선생님- 지식과 기술과 인격을 가르쳐주신 스승입니다. 셋째 교회 선생님-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맑고 바르게 살게 한 신앙의 지도자- 목사, 전도사, 교사가 스승입니다. 이를 인생 삼사(人生 三師)라고 합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귀하고 그 사랑과 수고를 조금이라도 헤아려 감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고 협력하고 순종하겠다는 의미에서 이 스승의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스승은 가르 치는 분입니다. 사실 이 나라의 미래는 우리 스승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육이 바로 서고,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교육이 바로 서려면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교육(敎育)의 교(敎)자는 효도 효(孝)자에 칠 복(扑)자가 더해진 것입니다. 효를 때려서라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육은 영어로 ‘에듀케이션’(education)입니다. 이 말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끄집어내다”라는 뜻입니다. 교육이란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육은 주입이 아닙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머리를 채우는 것을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학력이 좋으면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교육에서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 선조들이 참된 교육자였습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먹고 사느라 힘드셨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식교육’은 못 시켜도 ‘사람교육’은 시키셨습니다. 지금의 교육은 달라져야 합니다. 보통 교육을 바꾸고자 하면 교육 내용,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 고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는가”입니다. 배운 것은 잊어도 가르친 분은 기억합니다.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교육 내용이 아니라, 가슴 깊이 만난 스승입니다. (어린 시절에 주대준 선생님, 중학교 때, 이효춘 선생님. 고등학교 조성문, 신앙의 방황을 붙잡아 준 최병수 목사님, 방병덕, 그리고 황현수 목사님)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모델이신 한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성경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함축적이고도 정확하게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Ⅰ.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 삶의 방향을 가르쳐줍니다.예수님은 답을 가르쳐주는 분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 교육의 문제는 정답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답보다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서울을 가더라도 바르게 가야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빨리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얼마나 빨리가 아니라 얼마나 바르게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존경받는 스승은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고 가르쳐주는 자입니다. 한때 최고의 성악가를 꿈꾸던 한 선생님이 성대종양으로 인해 그 꿈을 접고 시골의 한 고등학교 선생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성악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졌지만 조직폭력배가 된 한 학생을 만납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을 통해서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조직폭력배에 빠진 그 학생을 최고의 성악가로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폭력조직에서 그 학생을 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기도 하고, 그 제자를 유학 보내기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무참히도 짓밟은 친구에게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 선생님은 제자를 최고의 성악가로 키워냅니다.
이 제자가 미스터 트롯에 출연한 김호중 씨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대한 성악가로 키워낸 그의 스승은 김천예고 서수용 선생님입니다. 김호중 씨를 키워낸 서수용 선생님은 대구 동신교회 찬양대에서 지휘를 맡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세계적인 테너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유명 오페라단의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른쪽 시신경 이상으로 세계적인 테너가 되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고, 유학 10년 만에 귀국하게 됩니다. 대학교수의 자리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김천예고 교장으로부터 교사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내가 고등학교 선생이나 하려고 20년 동안이나 그 고생을 했나’하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조직폭력배인 김호중이라는 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직폭력배인 그 학생을 성악가로 만드는 데에는 엄청나게 힘든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 중에 서수용 선생님은 이렇게 기도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야를 감당하기에는 지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끈을 놔야할 것 같습니다.” 그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호중이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었다. 정 그렇다면 나도 너를 잡고 있던 이 끈을 놓아버려도 되겠니?” 그 음성을 듣고 서수용 선생님은 눈물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런 혹독한 과정을 거친 후에 김호중이라는 성악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호중 씨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서수용 선생님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세계적인 조직폭력배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주를 소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한마디 말씀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스승이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Ⅱ. 내 인생의 길잡이인 예수님의 모습은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건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이 진정으로 존귀한 분이심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얻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크고자 하는 마음 대신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 대신에 누군가의 종으로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결코 비굴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 힘이 없어 무릎을 꿇는 것은 비굴함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힘 있는 사람이 무릎을 꿇는 것은 결코 비굴함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남을 높여주기 위해서 무릎을 꿇는 것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13:1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실천은 '본'(example)이었습니다. ‘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따라 오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그의 제자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의 의미가 바로 “따라가는 자들”(followers)이란 뜻이 아닙니까? 우리가 자신들을 예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못할까요?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막10: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언제나 남을 섬기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기쁨이 있고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섬길 때 주어집니다. 사람은 내게 소명으로 주어진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섬길 때 거기서 하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일을 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섬김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스스로에게는 행복을 만들고 이 세상에는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Ⅲ. 내 인생의 길잡이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13장에 보면 이제 내일이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자들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유다 아시죠? 유다는 지금 예수를 배반하려는 계획을 다 짜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손이 덜덜덜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유다의 발을 다른 제자들처럼 다 씻겨 주셨습니다. 그때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발을 척 내 맡기는 유다를 볼 때 속에서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눈치 채지 않게 초연하게 다 씻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시간까지 유다를 기다리셨습니다. 발을 씻겨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하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위대한 스승은 실수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끝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요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신앙의 스승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즘 교권이 무너지고 이젠 교사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렇게 강단에서 교사에 대해 외쳐도 현실의 벽 앞에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그래도 보람을 가지고 교단에 서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 일을 천직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사건들이 자고 나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도 때묻지 않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할 소리다 하는 세상을 보면, 숨이 콱콱 막히는 심정이라는 것 여러분도 다 경험하실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정말 어둡습니다. 사탄이 정말 제 철을 만난 듯 날 뛰지 않나 생각합니다. 교회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속의 물든 우리의 아이들을 영적인 감화를 통해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 얼마나 어렵습니까? 학교와 가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아이들에게 주일날 한 두 시간이 과연 저들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답답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귀한 직분임을 알면서도 그만 포기 하려는 선생들이 자꾸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사실입니다. 이 처럼 교사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사랑의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 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스승은 온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를 포함해서 교회의 중직이나 목장지기, 교사들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말과 행동이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가르치는 자의 고민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좀 실수하고 넘어질 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이해하고, 덮어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실수로 인하여 배우는 자들이 실족할 때면 가르치는 자는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합니다. 히13: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이것이 바로 목자의 심정입니다. 자기 때문에 양들이 넘어지거나 실족하면 자괴감에 빠집니다. ‘내가 잘못해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구나’ 라는 죄책감이 따라옵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지나친 자괴감이나 죄책감은 영적 침체를 가져옵니다. 물론 자신의 실수와 허물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하지만 그것이 봉사에 대한 회의감이나 영적인 침체에 빠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의 허물을 보았을 때 결과를 보고 상처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 스승들도 저런 약함이 있구나, 오히려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는 가운데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제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리키는 것은 사막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불모지를 생명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친 돌과 메마른 흙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모래먼지 밖에 보이지 않는 황무한 곳이지만, 이미 심는 자의 마음속으로는 꽃을 보아야 하고, 새가 깃든 우거진 나무를 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영혼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끈기있게 복음을 심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정말 눈물과 정성, 그리고 상상도 못하는 희생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학교에서 땀흘리시는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섬기는 목장지기, 또 경로대학이나, 실로암 대학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사회 각지에서 교사로서 교수로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스승!! 그들은 해산의 수고를 위해 이 땅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