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네가 희망이다. 단1:8-16. 2020. 5.24
청년 여러분, 오늘 성년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청년들이 성년 - 어른-이 된 것을 온 성도들 앞에서 확인하고 이들을 축복하고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성년식을 갖는 청년들과 선. 후배 모든 동성의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이는 들었지만, 갈렙같은 청년이 많은 우리 교회에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나이 불문하고 모두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요즘 미래의 꿈을 꾸며 불가능이 없어 보이는 청년들도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청년들이 어느 선교회에서 자신들의 고민을 쏟아놓았는데 공통점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1.나는 뭘 먹고 살 것인가? 진로에 대한 고민 2.나는 누구랑 같이 살 것인가? 결혼에 대한 고민 3.나는 무엇을 믿을까? 신앙적인 갈등과 고민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공통적인 고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상황이 너무 힘드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코로나 19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더 힘들고, 공부하기 더 힘들고, 취직하기 더 힘들고, 살아가기 더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불평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낙심하면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될 뿐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다. 용기를 가지고 받아들이십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용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우리 시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은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다니엘이라는 청년도 우리보다 더 힘든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불과 15세 전후의 나이에 침략군 바벨론에게 불모로 잡혀간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생전에 고국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평생을 이국땅에서 볼모의 신세로 살았습니다. 당시에 그가 끌려간 바벨론은 하나님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 나라는 온 천지가 죄악으로 캄캄했고 더럽고 추악한 냄새만이 가득한 이방국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90세가 넘도록 그 지역에 살았고 정권이 세 번이나 교체되는 정치적인혼란 속에서도 새로 들어선 정권과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높은 위치를 지켜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니엘은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히 세계 정치를 움직이는 오고 오는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삶을 보여주는 영향력을 끼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바벨론에 노예처럼 끌려온 이들은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청년들 아닙니까? 요즘 말로 노예로 끌려온 그들에게 있어서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사치스러운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눈에 번쩍 뜨일 구인광고가 등장 합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파격적인 인재 등용을 바벨론의 왕인 느브갓네살이 제안을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방인의 왕이었지만 세상 적으로 볼 때 그는 굉장히 지혜로 왔습니다. 자기나라에 끌려온 포로들 가운데 똑똑한 인재를 발굴을 해서 그들을 가르쳐서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인재등용 정책을 씁니다. 그 왕이 세운 선택의 기준을 보십시오. 그것은 흠이 없는 자, 아름다운 자, 모든 재주에 통달한 자, 지식이 구비하여 학문에 익숙한 자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뽑혀진 사람이라면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말하면 대단한 스펙을 가진 자를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훈련의 내용을 보면 갈대아 사람의 학문을 배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를 가르쳤고 왕의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왕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굉장한 예우요, 대접입니다. 최고로 대접하며 환심을 사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훈련시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치밀하고도 지혜롭게 자기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사람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여기에 뽑힌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 6,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 중에 유다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이제 모든 것이 다 바뀌었습니다. 어차피 나라는 망했습니다. 이젠 고국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 어쩌면 크나큰 행운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세상 적으로 보면 출세의 길에 들어선 철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여기에 보면 “뜻을 정하여”라고 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동화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켜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다니엘에게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절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갈대아 바벨론이 아닙니까? 당대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정복자 왕 느브갓네살 왕의 궁궐이 아닙니까? 느브갓네살 왕은 자기 나라는 물론이요 예루살렘 성전까지 불태워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당대에 최고 포악한 왕입니다. 시드기야왕이 예루살렘 궁궐을 버리고 애굽으로 도망치다가 잡혀와 시드기아 왕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아들을 칼로 다 죽여버리고 시드기야 왕의 눈까지 뽑아버린 무자비한 왕이 느브갓네살 왕입니다. 그런 왕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소년들이 자기들이 먹고 싶은 것만 먹겠다고 자기주장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표현처럼 ‘죽을라고 환장을 아닙니까?’
Ⅰ. 이 뜻을 정한 것은
지금 다니엘과 친구들은 그들의 몸을 부정한 음식물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영혼을 우상 제물의 시궁창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은 몸과 영혼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거룩한 말씀과 계명으로 성결하게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의 제물과 환락을 부르는 술과 포도주의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 오직 자신의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거룩한 전으로 하나님께 바쳐드리고 싶었습니다. 단지 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가졌던 신앙의 정체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쾌락과 환락으로 떨어지게 하고 우상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는 왕의 진미를 거절해버렸던 것입니다. 용기있는 거절입니다. 이 거절이 주어지는 불익이 어떤 것인지 왜 몰랐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용기를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청년 여러분, 요즘처럼 의심하는 시대, 부정(否定)하는 시대, 반역하는 시대, 모든 것을 머리로 판단하는 시대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바닥납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믿음이 없으면 바닥을 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날아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지면 죽는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Ⅱ.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3장에 보면 이들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옵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롤러고스트를 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위기가 오고 우리의 삶을 흔들게 만듭니다. 그때마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지금 느브가넷살은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랄 평지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고 그 우상 앞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절하라고 합니다. 3:15절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누가 감히 내가 하는 일을 가로 막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신이 있어 내 권위를 부정하며 내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17-18절에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여기서 풀무 불이란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피우는 요즘 말로 용광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소 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해서 이 세 사람을 끌고 가던 사람이 풀무 불 밖에서 불에 타죽을 정도로 뜨거운 용광로였습니다. 이 두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리아실지라도’ 라는 자세로 풀무에 들어간 저들의 모습 속에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여러분?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었던 주님의 절규가 바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고백이 아니었을까요? “내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 풀무불 속에서 내 몸이 타는 것이 진정 하나님 뜻이라면 나는 이 상황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일찍이 칼빈 또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지옥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한다면 지옥을 내려가는 길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지옥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러분? 바로 이 한 단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뜻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인 신뢰를 보냈던 이 세 청년을 하나님께서는 끝내 외면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세 청년이 풀무 불에 던져지자마자 불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껴안고 구원하신 분이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살리려 하나님 그 분이 십자가 불속에 뛰어들어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가슴에 끌어안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셨던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Ⅲ. “알고도”
다니엘서 6장에 보면 그의 생애 또 한번의 위기를 만납니다. 이제 그는 이 땅에 모든 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이 신앙을 송두리째 뽑혀지는 위기를 만납니다. 단 6: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장면의 아마 다니엘에게 엄청난 신앙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당시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총애하여 셋 중의 최고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이 시기하여 다니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니엘의 유일한 약점인 신앙적 부분을 악용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의 사람이나 신 앞에 절하는 자는 사자굴에 넣기로 하자고 왕을 설득했고, 왕의 재가를 받아서 왕의 도장이 찍힌 조서를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다니엘은 총리였기 때문에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이 일로 다니엘은 조서대로 체포되었고,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하던 대로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져서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기도한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불굴의 신앙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다니엘을 주목하시고 높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이 겪었던 이런 박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다니엘의 이런 불굴의 신앙이 필요 없다고 치부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스기니스가 쓴 ‘저항’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 우리 시대를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시대는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의 시대에는 박해를 통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면, 오늘은 유혹과 미혹을 통해서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처럼 박해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과 미혹으로 우리의 신앙을 변절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속주의 물결이 거대한 해일처럼 모든 사상, 가치관, 사람들의 생각을 뒤덮어버리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올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코로나19로 인해 전쟁터와도 같은 세상을 살면서 어떤 느낌을 받고 계십니까? 일상의 삶이 멈추고 우리는 거의 석 달 가까이 너무나도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의 확신이 많이 진정되고 있지만, 언젠가 또다시 제2차 확산이 재발할 수 있고 전 세계가 다시금 팬데믹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으면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제는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포스트코로나(코로나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장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일은 아무리 상황이 변화되고 바뀌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붙잡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시대가 빨리 변할수록 우리는 더욱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표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변화에 맞춰가는 노력도 분명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화되는 상황에 뒤따라가려다 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잃기도 하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이 다니엘처럼 변화하는 시대에 변치 않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도전하는 우리 청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뜻을 정하고 손해가 오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당당히 서는 자리에 서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죽고 사는 일, 우리의 성공하고 실패하는 일, 우리의 행불행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대 청년 - 니네 들이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