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케 하소서!! (합 3:1-3) 2010. 2. 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2-14 |
조회: 2067
오늘은 주일이자 설 명절날입니다. 명절이 주일날과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데 금년 설은 주일과 명절날이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고들 합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음 주부터 교회가 부흥회를 하는 것은 매우 뜻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데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세워져서 살아간다면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구력으로 새해를 맞아 ‘부흥’이라는 주제로 은혜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부흥이란 말을 사전에서는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revival’ 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다시'라는 의미의 접두사 ‘re'와 '살다'라는 의미의 'vive'가 합쳐져서 '다시 살아나다' '회복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낙심했던 자들이 새 힘을 얻고, 절망 가운데 있던 자들이 소망을 발견하고,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무능력하던 자들이 세상에 소망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하박국은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입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서 11년간 통치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많은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성경을 읽어주면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나라에는 우상이 가득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모습 뿐 이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핍박을 받고, 악한 사람들이 흥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박국은 선지자로소 예루살렘 안에 만연되어 있는 악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어떻게 하나님의 도시가 이렇게 죄악으로 뒤덮일 수 있습니까??하고 여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을 뻔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도덕적으로 너무 병들어서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불치병이라 이제 곧 바벨론 군대를 보내어 멸망시키려 한다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하박국은 3장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그래서 그 심정을 고백하기를 1장14절에서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하고 기도합니다. 이 답답함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다가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 백성을 구하시겠다. 그러므로 의인은 어떤 경우라도 낙심치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멧세지를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문제를 직면하게 될 때, 그래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 않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태에 있을지라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히10:38-39에 보시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무슨 말입니까? 믿음을 가진 자는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뒤로 우리는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다”에서 ‘침륜’은 우리가 생각하는 ‘침체’와 같은 뜻입니다. 영적 침체는 믿음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집니다.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침체된 자들을 완전히 버리십니까? 아닙니다.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침체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뿐더러 많은 주위 사람들을 낙심시키고 실족시키지 않습니까? ‘야! 믿는 사람이 겨우 저 정도인가!’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신만 더해줍니다. 침체에 빠진 그 자신은 나중에 다시 일어서면 되지만, 그동안 상처 주고 낙심시킨 자들은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습니까? 남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의 말을 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있을수록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속히 그날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오늘 읽은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입니다. 2절을 보십시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 내시 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영어 성경에는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해가 지기 전에 이루어주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천천히 부흥을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불의가 가득하고, 악이 가득한 오늘의 삶의 자리에 속히 부흥이 임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부흥, 교회의 부흥, 민족의 부흥이 무엇입니까? 숫자가 늘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부흥을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물론 부흥의 파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흥의 파도는 하나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데 부흥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기 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부흥을 갈망하고 기대해야 합니다.하나님은 언제나 사모하고 기대하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토미 테니(Tommy Tenney)라는 목사님은 “갓 캐처스(The God Catchers)”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기대하며 사모하는 태도입니다. 시편 81:10절에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하십니다. 조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가 낳은 새끼가 다 소중하지만 입을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먼저 먹이를 넣어 준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한 자에게는 깨달을 때 까지 두고 보십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채워주십니다.
우리 교회는 21일 낮에서부터 수요 저녁까지 8번의 집회 시간을 갖습니다. 먼저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하십시오. 매년 하는 행사로 생각하지 마시고, 이번 기회가 나에게 주신 마지막 부흥회인 것처럼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하박국 선지자처럼 ‘해가지기 전에 나에게 부흥을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고 준비하십시오. 반드시 사모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그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둘째로,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탁월한 평신도 저술가 C.S. 루이스는 “타락한 시대에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몸부림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시대가 타락할수록 죄에 대해서 둔감해 지고,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가 없다는 말입니다. 부흥은 언제나 눈물의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늘 회개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늘 똑바로 갑니까? 가다가 삐뚤삐뚤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삐뚤어지면 “잘못했습니다.”하면서 돌이키는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삐뚤어져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계속 삐뚤게 가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과 유다의 죄악을 다섯 가지로 하박국 2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서 2장의 내용은 다섯 가지 죄악입니다. ①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의 죄’ ② ‘자기의 집을 위해서 불의의 일을 취하는 죄’ 즉 뇌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③ ‘다른 사람의 피와 땀으로 성을 건축하는 통치자의 죄’ ④ ‘술을 이용해서 성적 타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백성들의 죄’ ⑤ ‘생명 없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의 죄’ 이 다섯 가지 죄악을 하박국이 지적하면서 이런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면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하면 정결케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방법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더러운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바꿔줍니다./ 회개의 눈물은 탄식을 변하여 새 노래, 찬양으로 바꿔줍니다./ 회개의 눈물은 절망을 변하여 새로운 희망으로 바꿔줍니다./ 회개는 진정한 부흥의 전제 조건입니다. 셋째로,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부흥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기름부으심의 결과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새로워집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성령체험을 했을 때 제자들이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합니다. 능력이 나타나 병든 자가 치유됩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늘어납니다. 부흥은 성장이 아닙니다. 성장은 인간의 계획과 노력, 프로그램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이뤄집니다. 산술적인 증가가 아니라 폭발적인 부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비결은 바로 정결한 마음입니다. 회개입니다. 사도행전 2장 37-38절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의 엑스레이를 통과하면 죄가 깨달아집니다. 죄가 크게 보입니다. 가벼운 죄가 무겁게 느껴집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흥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부흥이 임하면 기대하지 못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1. 하나님만이 우리의 전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 등입니다. 과수원마다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 버립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죠.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없음’의 소유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18절을 보시면 그가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가 이처럼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로,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1절을 읽어보면 퍽 재미있는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 - 그 뜻이 뭘까요? 악기 이름이거나 어떤 음악 부호 일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절정의 환희, 용솟음치는 기쁨을 표현하는 부호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민족의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던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부흥이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심판의 불길 앞에 쓰러져가는 이 민족, 이 백성 안에서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 일어나고 다시 살아날 것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영혼에 대한 열망이 그로 하여금 이 기쁨을 담고 부흥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그가 살던 고향 도시지역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빚 갚기 위해서 입니다.""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통 빚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제 빚 갚는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실감 있는 고백입니까?
여러분! 우리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의 부모, 우리의 스승, 또 우리가 먹고 살고 존재하기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름 없는 수많은 우리 이웃들의 헌신과 땀 흘림의 수고 없이 오늘 여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 앉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 교회는 다음 주부터 봄 방학을 이용해서 온 가족과 온 교우가 한 자리에 모여서 말씀사경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박국 선지자는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무려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래 먼 종말에 부흥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부흥을 회상 하나이다” 그것도 아닙니다.
이 하박국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여 우리의 삶이 진행되는 이 현실속에서, 지금 아주 가까운 장래에 이런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것을 놓고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박국의 기도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생존(survival)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revival)이요 회복입니다. 이제 시작되는 부흥회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강력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사모하십시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자신을 부흥시키고, 가정을 부흥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이 민족을 부흥시키는 놀라운 부흥의 바람이 우리 가운데 불어올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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