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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 벧엘로 올라가자!! (창35:1-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0-05-31 | 조회: 712
벧엘로 올라가자!! 창35:1-8. 2020. 5/31.

 

오늘 주일 예배는 한국 교회가 ‘예배 회복의 날’로 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는 지금 너무나도 위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건강이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경제적인 활동이 위축되면서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들이 너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로, 사람들의 외부활동을 자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활동반경이 줄어들어 더더욱 우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요, 근래 좀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확진자가 급상승하는 일이 일어나다 보니 우리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전 국민이 병실에 입원해 있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앙인들은 그런 힘든 시기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면서 위로를 받고 답답한 인생의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예배마저 포기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한 것은 코로나 19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역삼동에 있는 LG 아트쎈타에서 코로나19 퇴치하는 씻김굿을 했습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무당은, 요즘 한창 뜨는 송가인의 어머니입니다. (송순단-진도 씻김굿 무형문화재 27호) 그리고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외교부, 문화재청이 후원으로 하는 행사로 한국에 나와 있는 외교관들도 다 초청해서 열렸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악성 바이러스가 인간을 향해 총공격을 가하고 있고 최고 수준의 현대 과학과 의학도 지금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①.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잘못 살아온 삶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⓶. 하나님 없이 바벨탑을 높이 쌓아가고 있는 인간의 교만을 꺾는 사건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에게 전 인류가 이렇게도 무기력하게 무너지는가? 그렇습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질그릇입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세겜 땅에 머물던 야곱의 가정이 감당치 못할 풍파가 몰아쳤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인 디나가 이방 남자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동생에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안 오빠들은 동생을 강간한 자뿐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는 복수극을 벌입니다. 이 일로 인해 가나안에 있는 이방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자리에서, 이제 다시는 일어 설 것 같지 않는 공포와 절망이 깊게 드리운 바로 그 자리에서 야곱은 자기 가족들을 전부 모아놓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벧엘로 가자는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위기 앞에 그가 가졌던 자세를 통해 진정한 예배 회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Ⅰ. 왜 벧엘로 올라가자는 것입니까?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 여기 '환난'하면 날마다 신앙 때문에 쫓겨 다니면서 핍박당하는 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원래의 뜻은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만나서 근심과 불안에 싸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고통하고 고민하고 근심할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오늘 야곱이 가족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벧엘은 야곱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예배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 권과 축복 권을 가지고 야밤도주를 합니다. 정신없이 도망하다 한 들판에서 지쳐서 잠이 듭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창28: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겠고, 너를 이끌어 이 땅에 다시 오게 하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이 벧엘입니다.

 

그는 거기서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서원을 합니다. 창28:20-22절절에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벧엘에서 서원했던 그 일이 벌써 30년이 가까이 지난 거예요. 그동안 서원한 것을 새까맣게 잊은 겁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잘 될 때는 내 잘난 맛에 거드럭거리고 살아갑니다만,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니까 비로서 자기를 돌아보면서 얼마나 자신이 교만하게 살았는가를 안 것입니다. 여기 “벧엘로 올라가자"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올라가자’는 말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에 대한 갈망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하나님의 도움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자기의 지혜를 썼고,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가 14년 간 애써서 얻었습니다.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때도 삼촌의 집에서 자기가 노력했고, 자기가 머리를 잘 써서 삼촌의 재산이 자기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러 왔을 때도 에서와 잘 이야기해서, 결국 자기의 지혜로 원수 관계가 풀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의 노력과 애씀과 재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베여 들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더욱 힘든 것은 자기의 아들들 내면속에 있는 잔인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하는 복수극을 보면서 야곱은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결과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얻기 위해서 추구하고 또 추구했던 결과란 말인가?’ 마음속에 깊은 생각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녀들을 나무라지만,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나요? 오히려 대꾸합니다. 일일로 더군다나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족속들이 야곱의 집을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야곱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녀들에게 기댈 수도 없고, 이방 민족으로 부터도 피할 곳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택한 내 인생 절대로 용도 폐기 처분용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1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잊혀졌던 한 가지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형의 칼을 피해서 도망갈 때 제단을 쌓았던 그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거하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피할 길을 또 열어주신 것을 봅니다. 그때서야 비로서 잊혀졌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28장에 약속하신 그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축복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Ⅱ. 이제 그는 가족을 모으고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2절입니다. “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 지금 야곱은 식구들에게 그 말씀을 전달하는데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먼저 우상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운 모든 것을 청산하라는 겁니다. 대청소하고 성결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사실 야곱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인 벧엘로 가는 길에 이 세겜에 들렀다가 여기 주저앉은 겁니다.

 

학자들은 이 기간이 한 10년 정도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수완이 뛰어난 야곱의 눈에 이 세겜은 황금의 땅입니다. 여기서 벧엘로 올라갈 것을 사는 동안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마냥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천년만년 세겜의 숙곳이란 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 재미에 빠져 있을 때 이 환난이 난 것입니다. 그것이 ‘디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이방 땅에 와서 살던 그들이 몰살의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그들 속에 감추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습니다. 4절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여기 야곱의 자녀들과 아내가 지금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여기 상상치도 못한 우상들이 그들의 손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아내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가 신주 모시듯 하는 ‘드라빔’을 훔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터지고 보니까 모양만, 무늬만 예수 믿는 빗깔이지 전혀 예수와 상관이 없는 이방 사람의 문화에 젖어 있는 야곱의 가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 합니까? 세겜땅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이 없어졌습니다. 세속의 파도 속에 엉키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 보다 세상이 좋아하는 우상에 젖어 들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나의 관심과 정성을 다 뺏아 갑니다. 계속 집중하게 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하나 이상의 우상을 간직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은 포기 할수 없다.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것만 건드리면,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것, 그 순간 하나님도 온데간데없어지는 바로 그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땅에 던져 묻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구제역에 걸린 생축을 미련없이 땅에 묻는 것처럼 결단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야곱이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은 것은 단순히 이방 신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방 신상과 함께 자신의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습니다. 세겜에서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딸입니다. 시집가야 할 딸이 강제로 추행을 당하고 만 사건은 딸 디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 전부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세겜을 떠나오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신상과 귀고리를 묻었다는 말은, 그런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겜을 떠나면서 야곱이 가슴 아픈 과거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지난 삶에 겪었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 가슴 아팠던 일들을 모두 묻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웠던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빨리 잊는 게 유익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자꾸만 되살아난다면 우리는 그 때마다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쓰라린 과거 때문에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또 다시 고통의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Ⅲ.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5절입니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 ‘떠났으나’는 말은 ‘날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상상이 갑니까? 도무지 일어설 것 같지 않던 야곱의 가정이 마치 독수리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힘찬 모습으로 세겜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방 사람들이 오히려 야곱의 가족을 두려워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을 오늘까지 지켜주셨고 내일도 동행하시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분의 은혜 하나로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셨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의 변화를 위해서 여러분의 삶속에 오늘도 뛰어들어 일하시는 이 모습을 보십니까? 시146: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축복, 빛나는 인생의 황혼,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야곱을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야곱을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새롭게 일으켜주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 지렁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
며 미물처럼 의미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던 야곱을 돌아보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야곱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부끄러워하지도 싫어버리지도 않으마 말씀하시며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에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해 자녀로 삼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환난 당해 씨름하고 몸부림칠 때 가만히 계실 리가 있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벧엘로 돌아갔을 때 그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9-10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 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야곱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예배의 회복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움추렸던 우리 의 삶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내 안에 모든 타성과 믿음 없이 살았던 삶을 회개 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교회는 다음 주 사람을 세우고 교회 창립을 기억하며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모두가 새로운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인격자 되신 그 예수를 만나는 회복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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