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사 중입니다. 엡3:12-19
이제 교회는 다음 주면 창립 51주년의 뜻깊은 시간을 맞게 됩니다. 50년의 희년이 끝나고 새로운 원년이 시작되는 올 해에 우리는 상상도 못한 코로나19로 삶의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더 힘들고, 학생들은 공부하기 더 힘들고, 취직하기 더 힘들고,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살아가기 더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불평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낙심하면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될 뿐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다. 용기를 가지고 받아들이십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용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힘든 시기에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부족한 종도 그렇고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워질 사람들도 여러분의 눈에 부족한 면이 많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건물로 치면 준공검사가 되지 않은 공사판과 같습니다. 공사 중인 곳엔 예외 없이 ‘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보게 됩니다. ‘낙석을 조심하시오’ ‘먼지가 많이 나니까 통행에 불편을 드려 매우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아직 공사 중입니다. 우리로 인해 머리가 깨진 사람도 있고, 상처받은 사람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교회는 미완성입니다.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을 보면 압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싸움과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들이 점점 덜 유치한 것으로 발전하고 고상해져 가는 것이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속도가 너무 느려서 절망할 때도 있지만, 교회를 세워나가는 건축자는 그리스도이시고, 건물을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당신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설혹 교회가 조금 잘못된다 해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부터 3장까지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십시오. 한 두 교회는 그런 대로 괜찮은 교회지만 나머지 다섯 교회는 형편없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런 교회들을 놓고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로마의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세상, 그러니까 주후 62년 전 후의 이 시기는 한창 로마의 영광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옥중에서 쓰면서 로마의 영광이 아닌 교회의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를 가졌던, 매우 영향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기 생애에서 한 곳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오랫동안 보낸 시간, 적어도 3년여의 시간을 보냈어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기부터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에베소에는 우상이 창궐하고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는 고통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신앙이 흔들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기억하며, 이 교회가 로마의 지배와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무릎 끓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기대 속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막연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4-15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여기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 사도의 13개의 서신서에는 곳곳에 기도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표현은 여기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세속의 한 복판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세상 앞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이기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피를 토하듯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Ⅰ.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독특한 경험을 하려고 하고, 그래서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은 스펙을 많이 쌓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모가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성형수술을 통해서라도 그 능력을 키우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젊음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결코 붙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명성도, 자기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고후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 속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습니까? 16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부요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케 되는 것은 인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또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영혼이 부요해지거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 강건케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는다는 것은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4:7-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깨어지기 쉽고 볼품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사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길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힘 주시면 우리를 당할 세상의 힘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않고 사십시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우리의 경건은 모양만 남는 껍데기가 되기 쉽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살면 세상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안고 살면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꽉 차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꽉 차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물을 한껏 머금은 스펀지를 약간만 건드려도 물이 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과 같이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모여 있다면 강력한 교회가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이전의 유치함을 벗어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 이후에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할 성숙입니다.
왜 아이들끼리 늘 싸울까요? 둘 다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한 명이 좀 더 크면 싸움이 없어집니다. 내 눈에 아직 거슬리는 사람이 많고 누가 한마디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려 시험에 든다면 아직 영적으로 어리다는 증거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큰일을 당해도 해석의 능력이 탁월합니다. 어릴 때는 분노하며 그럴 수 있냐고 말하지만 성숙에 이르면 다 이해가 됩니다. 담아내는 용량이 커진 컷입니다. 왜 원수가 많습니까? 갑자기 원수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내가 품어낼 용량이 작아지고 좁아졌기 때문입니다.
짜증이 많아지고 원망과 불평이 많은 편이라면 내가 유치하다는 뜻입니다. 성숙하면 원수까지도 품어냅니다. 미워함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더 커집니다. 싸움은 비슷한 체급끼리 싸웁니다. 그러나 체급 차이가 나면 싸우지 않습니다. 아이와 아버지가 싸웁니까? 싸움하면 누가 이깁니까? 아이가 이깁니다. 아빠가 져 주는 것입니다. 못난 아버지는 아들을 이기려고 합니다. 성숙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끙끙대고 힘들었던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가 안 됩니다. 끙끙대고 힘들어했던 문제들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전에는 교회의 문제가 보이면 들추어내고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성장을 하면 책임을 느낍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게 됩니다. 자신이 하지 못한 책임을 느끼는 모습은 어른의 모습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말만 많이 합니다. 문제를 남 탓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면 저절로 모든 것이 회복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모든 하는 일에서 탁월함이 드러납니다. 직장에서도 눈에 띕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돈을 벌고자 하지만 우리는 돈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꽉 찼다는 말씀입니다. < /span>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하며 그 치디찬 감옥 바닥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Ⅲ.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18-1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 사랑에 대한 표현이 네 가지 나옵니다.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입니다. 이 사랑의 넓이는 사랑의 포용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길이는 사랑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높이는 사랑의 지고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깊이는 사랑의 심원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성도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그 사랑을 어떠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막연한 표현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어떠한'은 원어로 '포타포스(potapos)'입니다. 이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잘 쓰입니다. 마8:27절에 보면 예수님이 풍랑 이는 호수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바람과 바다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들은 '어떠한'이라는 말을 써서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떠한 사랑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 계시록에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계2: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인간의 모든 사랑은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뜨거운 첫 사랑도 식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주님 사랑, 성도 사랑도 그렇게 변질되어간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유지했던 그 따끈했던 사랑도 언제인가부터 식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랑을 회복할 것을 호되게 야단을 치십니다. 고쳐지지 않으면 회개 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공사 중이지만, 첫 사랑의 감격이 살아있는 교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사랑으로 가슴이 뛰는 성도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의 소망 때문에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때때로 이 시대 성도들의 예수님 사랑이 일개 연예인 앞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열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를 위해 조건없이 자신의 존재를 그리고 목숨을 버리신 분이 아닌가요? 그 사랑의 자각 때문에 그 사랑 나누기 위하여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교회라는 공동체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닌가요?
사랑하는 동성의 성도 여러분!
공사 중인 현장이 언젠가 완공이 되면 얼마나 멋집니까? 이제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고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성화의 열매를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깊은 절망의 감옥에서 피를 토하듯 외치는 노 사도의 그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주인이 오직 예수라는 그 사실을 잊지 말고, 내가 받은 이 구원과 지금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고 정말, 정말 하루 하루의 삶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로서 당당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제작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십시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 아무리 못난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주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